매일신문

주간데스크-힘이 안나는 세상

미국 LPGA에서 박세리의 걸음걸이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아름다운 컴팩트 샷을 날린 뒤 다음 샷을 향해 페어웨이를 걸어가는 그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언제 보아도 주눅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도 좀 체 표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 더러, 라운드 내내 상대에 무관심한 듯한, 그런 박세리의 당찬 카리스마에 기가 질려 제풀에 무너지는 상대선수들을 우리도 TV중계를 통해 종종 보고 있다.

◈박세리의 당당한 걸음걸이

얼마전 귀국했던 김미현선수도 박세리의 그 점을 높이 샀다. 그는 미국 프로무대에서 매 시합마다 선수들간에 기싸움이 치열하다고 전하면서, 박세리선수 특유의 씩씩하고 버젓한 걸음걸이에 대해 많은 외국선수들이 외경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초등학생 처럼 덩치가 작은 자신은, 살벌한 기싸움에서 밀리지않기 위해, 항상 생글생글 웃으며 라운드를 한다고 털어놨다.

올 여름 여자월드컵축구에서 우승을 이끈 미국여자축구팀 감독 토니 디치코의 독특한 선수 사기훈련. 그는 시합을 앞두고 여자선수들에게 자기팀의 게임을 담은 비디오를 틀어주면서 실수장면은 결코 보여주지않았다. 대신 선수들의 베스트 장면과 이긴 시합만을 되풀이해 틀어주었다. 선수들을 최상의 상태에 붙잡아두려는 나름의 사기진작책이었다. 미국 매스컴은 미국이 그 거센 중국을 꺾고 세계 정상에 오르자 그같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높이 평가했다.

◈국민 사기는 국력의 핵심

이 모두, 사기가 충천하면 절반은 이미 이기고 들어간다는 평범한 방증이다.

한 국가에서도 국민의 사기(Morale)는 대단히 중요하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지리 인구 경제력 군사력 못지않게 국민 사기를 국력의 핵심요소로 꼽으면서, 전쟁은 물론 평화시에도 국민 사기는 국가발전의 에너지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민 사기가 꺾이면 정부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며, 국민 사기가 높다는 것은 곧 좋은 정부가 존재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국제정치학자들의 주장처럼 국민 사기가 정부에 대한 신뢰감, 충성심, 일체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동인(動因)으로 한 나라의 흥망을 이끄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어느 지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계량화한다면 우리의 국민사기는 국제사회에서 어디쯤 가고 있을까.

최근 언론에서는 IMF 관리체제 이후 국가채무 두배 증가, 빈곤층 1천만명 상회, 증산층 몰락과 상류층의 증가, 공직사회 부패 심화, 금융계좌 뒤지기 두배 증가, 도.감청 폭증, 노인자살 50% 증가, 대형 인명참사 등을 시리즈 엮듯이 보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비상한 사회 안전망 구축의 시급성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총체적 위기상황에 빠져들고 있다는 경고음이다.

◈점점 살기 힘든다 소리만

정부로서는 이런 비판들이 억울한 모양이지만, 말하자면 외환위기 극복, 경제회복, 이런 저런 개혁의 성과들을 몰라주는 게 야속하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지금 세상분위기는 사실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점점 더 살기 힘든다는 소리가 늘고 있다. 우리나라 절대빈곤층이 IMF 처방후 두배이상 늘었다는 UN 보고서도 그렇게 들린다. 부유층은 더 살기 좋아졌다는 세상에서, 구조조정으로 풀이 죽은 봉급쟁이 가정 마다 마이너스 통장 개설이 무슨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전화통을 잡으면 공연히 찜찜하고, 누군가 예금계좌를 뒤질까 마음놓지못한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다. 교사를 우습게 아는 기이한 교실풍경, 도매금으로 부패집단으로 싸발린 공직사회, 정신 어지러운 갖가지 의혹과 고소 고발들, 오로지 상대의 피눈물만 요구하는 정치판, 이 또한 오늘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이로 인해 걱정스러운 것은 여기에서 싹트는 불신과 무기력, 무관심과 냉소다. 우리사회를 무섭게 허무주의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래서 두려운 것은 뒷전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는 국민들이 느는 것이다.

세계는 새천년을 향해 뛰고 있는 데 우리는 지금 이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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