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38일후면 서기 2000년. 인류역사 중 가장 다채로웠던 시대, 격변의 20세기도 영원 속으로 사라지고 바야흐로 새 천년의 지평이 열린다.
12월 31일 밀레니엄 이브에서 새해 1월 1일로 바뀌는 그 순간, 아마도 지구촌 모든 사람들은 일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감회로 가슴을 울렁거릴 것 같다.
이 거대한 시간의 마디를 기념하기 위해 지구촌 곳곳에선 밀레니엄 페스티벌의 막바지 준비로 분주하다. '세계의 기준시'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 영국에선 밀레니엄 돔이 웅장한 장관을 드러내고, 이와 함께 세계 곳곳에서 100만개의 봉화가 동시에 점화된다. 뉴욕에선 5만개의 헬륨풍선과 3천500파운드의 색종이를 뿌리는 사상 최대의 불꽃놀이가 열리고, 프랑스에선 프랑스 북부에서 남부까지 죽 이어 밀레니엄 기념 나무를 심는다. 이집트 피라미드 옆에선 오페라 아이다와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뒤섞인 대형 무대가 펼쳐지며, 중국의 만리장성,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인도의 타지마할 등 유적지에서도 빠짐없이 축하행사가 열린다. 전지구적 쇼가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00년간 지어질 평화의 열두대문 중 첫 대문의 삽질이 시작되고, 빛고을 광주에서는 현란한 '빛'의 축제가 펼쳐진다. 포항 호미곶에선 새 천년의 첫 태양을 가슴에 품는 해맞이 행사가, 대구의 국채보상기념공원에선 210개의 북들이 21세기 첫 새벽을 힘차게 맞이한다.
만약 우주에서 지구라는 별을 내려다 보는 그 어떤 존재가 있다면, 이 날 그가 보게 될 지구별의 모습은 아마도 지구탄생 이래 가장 시끌벅적 요란스런 모습일게다.
이제 축제의 폭죽을 터뜨릴 그 시간은 문 앞에 다다랐고, 사람들은 가슴 깊숙한 곳에 촛불 하나 밝힐 채비를 한다. 쉬임없이 흐르는 역사의 대하 앞에서 한 점 존재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미움과 갈등의 상극(相剋)에서 사랑으로 더불어 사는 상생(相生)의 내일을 꿈꾸며….
정녕,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도 아닐 터 이건만 2000년 새해부터는 뭔가 달라진 세상을 보고 싶다. 속이 빤한 거짓말로 온 국민을 속이려 드는 불쌍한 거짓말쟁이들과, 제 뱃가죽 터지는 줄도 모르고 국민의 돈, 남의 재산을 마구 집어삼키는 어리석은 욕심쟁이·사기꾼들과, 어린 여학생들에게 술을 팔게 하고, 돈 몇푼에 그들의 미래를 까맣게 황칠해 버리는 낯두꺼운 철면피들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 굽은 허리로 여름 내내 돌본 자식 같은 농사거리들을 어느날 도시의 차떼기 도둑들에게 몽땅 잃어버리고 애통해 하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 새해에는 그분들의 주름살투성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이 나라가 됐으면 한다.
문득, 퀼트(quilt)를 생각해 본다.
서양 가정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퀼트는 자투리 헝겊들을 조각조각 맵시있게 꿰매고 솜을 도톰하게 채워 만드는 이불보나 테이블보, 벽걸이 같은 생활수예품을 말한다. 청순한 미모의 여배우 위노나 라이더가 주연한 영화 '아메리칸 퀼트'에는 동네 친구사이인 할머니들이 매일같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조각천으로 이불보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살아온 인생역정이 다르고 현재의 삶도 각양각색인 그들은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여러가지 어려움과 갈등을 천조각들을 바느질하는 과정을 통해 지혜롭게 극복해낸다.
하찮은 사물들이 때로는 우리에게 삶의 깊은 예지를 보여줄 때가 있는데 퀼트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한낱 조각일 때는 별 쓸모없고 때로는 쓰레기통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여러개가 엮일 땐 호박이 황금마차로 바뀌듯 놀랄만큼 아름다운 존재가 돼버린다. 거기엔 더이상 헝겊조각이 없다. 그리스신화 속의 날개달린 말 페가수스, 숲 속의 멋진 성채, 어여쁜 신데렐라가 있을뿐. 하나만으로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변화이다.
가만히 보면 퀼트의 헝겊조각들은 똑같은 것이 없다. 제각각 다른 색깔, 다른 무늬를 갖고 있다. 독불장군처럼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손바느질로 만들어지는 그것은 하나하나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이다. 참으로 개성과 조화의 미덕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2000년의 시작과 함께 우리사회도 이런 퀼트의 미덕을 닮아가기를 기원해본다. 모두가 다르면서도 하나로 어울릴 수 있는 사회, 서로의 색깔과 무늬를 존중해주는 사회, 다른 사람에게 따스한 솜이불이 돼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꿈꾸어 본다. '채워 넣은 물건'의 의미를 지닌 퀼트처럼, 새 천년을 맞게 될 우리의 가슴에도 희망과 사랑과 정직의 미덕들을 가득 채워넣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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