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재일동포 100년(8) 한국전 참전 학도의용군

1950년 6월25일 38선에 총성이 울리고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됐다. 일본의 각 신문과 방송은 전쟁의 추이를 쉴새없이 보도했고 호외도 아침 저녁으로 뿌려졌다.

이국땅의 재일동포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조국을 돕기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었다. 그러나 조총련측은 앞으로 남쪽 전역이 적화돼 한국은 와해된다며 민단을 탈퇴토록 거짓 선전에 나서기도 했다.

1950년 8월8일 민단중앙본부에 '지원군 지도본부'가 설치됐다. 민단 각 지방본부에서 솔선하여 참전하겠다며 지원한 사람들은 건국청년동맹 소속 대원이거나 조국애에 불타는 대학생들이었다.

그해 9월11일 맥아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 제1차 69명의 지원병이 사이타마(埼玉)현에 있는 미8군 제1기병사단에 입대하였다. 당시 김용주 주일공사와 대한청년단 단장이었던 안호상 박사가 직접 이들을 인솔하고 격려했다. 뒤이어 다섯 차례에 걸쳐 모두 641명이 조국의 전선에 참전했다.

이들 지원군은 미군 7사단에서는 17연대, 31연대, 미 8군에서는 제92화기중대 등 미군과 한국군의 육군전투부대 등에 소속됐다. 서부전선 참전 지원군은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동부전선 지원군은 함흥을 거쳐 백두산 기슭의 초산까지 진격하며 참전했다. 지원군이 직접 참가한 주요 전투로는 인천상륙작전.원산상륙작전.평양탈환작전.혜산진 탈환작전.철원 3각지대 전투 등이었다.

이 지원군의 참전 사실에 대해 최근 출판된 민단 50년사에는 '세계전사상의 효시로 해외청년학도가 조국전쟁에 참가한 사실은 세계전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서술돼 있다.

전쟁이 끝나고 각 부대에서 제대한 참전 젊은이들은 가족들과 연고가 있는 일본으로 귀환하기 위해 부산에 모여 대기했으나 261명만 출국이 가능했다. 나머지는 일본측의 입국 허가 거부로 귀국하지 못했고 일부는 국군에 잔류됐다. 특히 전사및 실종으로 144명의 귀중한 생명이 조국에 바쳐졌다.

전사자중 58명은 국립공원에 안장됐고 나머지 참전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 장소를 확보했다. 1965년에는 도쿄에서 재일 학도의용군동지회가 설립돼 지금도 활동중이다.

1973년 6월에는 민단 중심으로 성금을 모아 국립묘지에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위령비'를 건립했다. 79년 10월에는 재일 학도의용군이 참가한 첫번째 전투인 인천상륙작전 전적지에 민단의 모금과 정부의 지원으로 '한국동란 참전기념비'가 건립됐다. 또한 89년 9월 민단 중앙본부회관 정면 입구에도 기념비가 세워졌다. 여기에는 참전용사들의 성명을 모두 명기하여 재일동포사회의 자랑스런 정신적 유산으로써 대대로 전하도록 하였다.

朴淳國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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