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재일 한국인의 위대한 어머니, 그리고 현명한 아내가 된다. 우리는 재일 한국인 여성의 계몽과 문화 향상에 기여한다..."
올해로 조직 결성 50주년을 맞은 재일본 대한부인회의 강령중 일부다.
도쿄에 있는 중앙본부를 중심으로 전국 46개 본부와 그 산하에 320개의 지부를 두고 있는 이 재일동포 여성단체는 이제 민단 산하의 거대한 조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단체는 재일동포중 여성과 관련된 문제의 해결은 물론 본국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
경북 성주군 출신인 배순희(裵順姬.83)씨는 재일동포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재일 대한부인회 중앙본부 회장을 거쳐 지금은 고문직을 맡고 있다. 해방 후 어려웠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평생을 바쳐 일본 정부의 차별정책에 대항하며 동포 여성들의 힘을 결집시켜온 좥여걸'이다.
특히 일본 정부의 한국인 차별정책과 관련해 여성회원 120명에게 한복을 입혀 이들을 이끌고 직접 제네바 국제인권위원회와 유엔을 방문하는 등 재일동포 문제를 국제사회에 공론화시켜 동포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 이바지했다.
그녀는 오사카(大阪)시내 조용한 주택가의 단층 목조 건물에서 지난 40여년전 이사온 이후 지금까지 살고 있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별로 자랑할 일이 없다며 사양하던 그녀에게 어렵게 면담을 허락받고 정원이 보이는 거실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경북 성주군 성주읍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여학교를 다닌 배여사는 일제의 수탈을 피해 고향을 등지는 부모를 따라 일본 규슈(九州)로 건너간 것이 1934년. 당시 18세였으며 그녀는 다음해에 7세 연상인 경북 의성 출신의 청년 하영운(河永雲)씨와 결혼했다. 부군인 하씨는 나중에 민단 구마모토(熊本)지방본부 단장으로 활동했다.
젊은 부부는 시장바닥에 노점을 내고 옷장사를 시작했다. 1942년 태평양전쟁으로 공습이 심해지자 미나미 규슈(南九州) 산속으로 옮겨 벌목용 도로건설 현장에서 일했다.해방후 구마모토로 이주한 배씨 부부는 동포 등 8명과 함께 역사 건물 앞의 땅 수백평을 싸게 빌려 시장을 열고 옷과 옷감장사를 계속했다. 국제시장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밤낮없이 일한 덕분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어졌다.
배씨 부부는 사무실과 자금을 내놓고 재일거류민단 구마모토 지방본부를 창단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국 분단으로 인해 동포사회까지 민단과 조총련으로 양분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지역에는 조총련 지지 동포들이 대다수였다.
배씨 부부는 일일이 동포들의 가정을 찾아다니며 민단으로 전향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구마모토 지역에 민단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녀는 재일 대한부인회 구마모토 지방본부 회장을 맡았다.
같은 시기 도쿄에서는 재일 대한부인회 중앙본부가 결성됐는데 배씨에게 있어서는 동포를 위한 여성운동이라는 큰 걸음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타고난 근면성에다 적극적인 성격으로 2년후 부인회 규슈연합회 회장까지 맡았다. 온 가족이 조총련의 테러 위험을 의식하면서도 동포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국제 정세를 설명하고 한국여성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설득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1956년 민단 지방단장을 맡고 있던 남편이 2남4녀의 자녀만 남겨둔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때 내 나이 39세였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무너질 수는 없다고 결심하고 아이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가산을 정리해 오사카(大阪)로 이사를 했지요"
여기서도 그녀는 6남매 자녀를 돌보며 대한부인회 오사카 지방본부 문화부장을 맡아 민족교육과 여성문화예술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5년 부회장을 거쳐 회장을 맡으면서 오사카 지역 한국여성운동에 더욱 정성을 다했다. 1970년부터 79년까지는 중앙본부 부회장을 겸임했고 드디어 79년부터는 중앙본부 회장으로 선출돼 87년까지 실질적으로 재일동포 여성계를 이끌어 왔다.
그녀는 취임초부터 재일동포의 권익옹호를 위해서는 투쟁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자세를 보여 부인회의 새로운 시대를 구축했다. 88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후 그녀는 올림픽 성금 1일 10엔 모금운동을 82년부터 시작해 88년까지 계속했다. 이렇게 모아진 모금액 15억원 중에서 우선 일부를 들여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시에 이동 화장실 400개를 설치해 아시안게임 조직위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또한 88년에는 외형이 한옥 형태로 디자인된 화장실도 전국에 15채를 건립했다.
지문날인 철폐운동이 일어나자 부인회는 일본의 각정당과 법무성에 제도개선을 요구했다. 또한 서명운동을 독자적으로 개시하여 6만5천명에 가까운 서명을 모았다. 82년8월 일본 교과서의 역사왜곡 문제에 대해 전국에서 몰린 1천여명의 부인들과 함께 문부성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후 독립기념관 건립시에는 성금으로 1천700만원을 전달했다.
84년 그녀는 사할린동포의 귀환을 요구하기 위해 한복차림의 재일동포 여성회원 120명을 이끌고 제네바 국제인권위원회 등 유럽을 돌며 재일한국인에 대한 인권억압 상황을 보고했다. 다음해에는 미국을 방문해 유엔에서 재일동포 인권문제를 다루도록 청원 행동을 벌여 세계인들의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이같은 그녀의 활동 덕분에 그동안 단순히 일본 국내문제로만 치부돼 오던 재일동포 문제는 국제적으로 다루어지게 됐다. 일본 정부가 재일동포 문제와 관련된 정책 입안시에 국제적인 여론을 두려워 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든 셈이다.
39세에 홀로된 그녀는 바쁜 사회활동 속에서도 6남매 모두를 대학 졸업시키는등 훌륭하게 키워내 동포사회에 '한국의 어머니상'을 심었다. 특히 3명의 자녀와 2명의 손자가 의사로 활동하고 있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일본으로 오게된 것이 처음엔 국운에 따른 운명적인 것이었지만 내가 죽어 영과 육이 나눠진다면 죽어서라도 일본에 남기는 싫습니다. 남편은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잠들어 있는데 나도 준비는 돼 있어요"
앞으로의 일들을 조용히 얘기하는 배씨는 80세를 넘긴 고령인데도 여전히 민단과 재일 대한부인회의 중앙본부 고문으로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재일한국인의 위대한 어머니가 되자...'는 부인회의 강령 처럼 평생을 재일동포 사회의 여성지도자로 살아온 그녀에게 정부는 1977년 국민훈장 동백장에 이어 1996년 10월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朴淳國 사진부장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