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토출신 재일동포들(10) 김복남 사장

"나는 최후의 재일동포로 남겠다. 만일 일본에 사는 모든 재일동포들이 일본 국적을 취득한다 해도 나는 한국 국적을 바꾸지 않겠다"

1천300여명의 직원들과 함께 마론그룹을 이끌고 있는 김복남(金福男.50)사장은 일본땅에 뿌리박고 살며 세계적인 거대 그룹을 경영하면서도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자긍심과 확고한 국가관이 서 있는 재일동포이다.

일본 오사카에 본사를 두고 있는 교에(共榮)마론그룹은 석유 화학제품 생산을 주력업종으로 하며 36개의 방계회사를 두고 총자산 1천300억엔, 연간 500억엔의 매상을 올리는 거대 그룹이다.

김사장은 1951년 마론 그룹을 창업한 고 김종수 회장의 장남으로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당시 김종수 회장은 경쟁이 치열한 합성 피혁 업계에서 독자적인 기술로 고급 원단을 생산해 일찍부터 이 업계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경북 청도군 매전면에서 태어나 9살때 일본으로 건너간 김사장의 선친은 회사가 본 궤도에 오르자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에 벌써 일본의 대한 경제원조 제1호로 울산에 한국 최초의 염화비닐 수지공장을 설립, 한국화학공업의 미래를 열었다. 이 공장의 준공식때는 고 박정희 대통령도 참가해 기념식수를 하기도 했다.

김복남 사장은 선친으로 부터 수월하게 경영권을 인수하는 보통의 2세 경영인과 달리 혹독한 경영 수련을 거쳐 김회장의 인정을 받은 끝에 경영일선에 나서는 과정을 거쳤다.

필자는 사장 인터뷰를 위해 오사카에 있는 마론그룹 본사 1층의 접견실에서 기다렸다.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 비서실 직원이 김사장의 경력서를 건네주며 말상대가 됐다. 게이오(慶應)대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도 공부했으며 경영학 석사, 세무사, 중소기업 진단사 등의 자격도 지니고 있다. 한시간 넘게 기다렸다. 비서가 안내하는 외래인 면담실을 거쳐 8층 사장 비서실로 안내됐을 때 대기 시간이 길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미 4, 5명의 면담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합천 해인사를 촬영한 흑백사진으로 벽면이 장식된 집무실에서 김사장을 만났을 때 그는 고향에서 온 기자와의 면담시간을 길게 가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먼저 마쳤다고 해명했다.

김사장은 자신이 한때 마론그룹에서 해고 당하기도 했다며 얘기를 풀어 나갔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연수생으로 입사했다. 입사 일주일째 처음 생각과 달라 연수할 수 없다며 나는 사장 아들임을 어필했다.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과정속에 상사인 과장에게 주의를 받고 결국 해고 조치됐다. 당시는 연수생이므로 회사 신분증과 보험증도 반납당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처음부터 시작하겠으니 현장에 보내달라는 청원을 하고 당시로서는 생소한 컴퓨터를 활용한 물류 과정 메뉴얼을 만들어 제출한 것이 받아들여져 생산관리직으로써 근무하길 2년10개월. 그 후에도 업무 개선을 위한 레포트를 계속 제출해 경영기획실에서 일하게 됐고 플라스틱의 기본적인 것을 익히기 위해 사우디로 향해 아랍 각국을 2년간에 걸쳐서 다녔다.

한국 여권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의 국경을 넘을 땐 위조여권을 사용하기도 해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기도 했다. 큰 석유탱크속에 들어가서 청소작업을 하고 나면 눈과 코에서는 며칠간 석유가 흘러 나왔다.

고 김종수 회장은 아들이라도 능력이 없으면 기업을 물려줄 수 없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김복남 사장은 대학시절부터 스스로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고 영국계 회사에 근무하며 유럽의 선진 경영기법을 배우기도 했다. 마론그룹의 정식 후계자로 임명받고 경영일선에 나선 김사장은 소량 다품종 생산을 위해 일본 전국에 흩어져 있던 공장들을 통폐합하고 업계 최초로 컴퓨터생산 시스템을 도입했었다. 개성적인 제품이 아니고는 생존할 수 없는 일본 시장의 특성 때문에 연구개발에 많은 투자를 계속했다.

김사장의 연구 개발에 대한 관심 때문에 고부가가치의 제품의 생산이 주효했고 이 회사에서 생산되는 합성피혁 원단은 일본 전국의 품질을 인정받아 스미토모화학, 이토츄 상사 등 굴지의 기업을 고객으로 하고 있다. 또한 엔고를 타개하기 위해 오래전에 이미 인도네시아, 대만, 중국 등에 투자하여 현지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김사장은 기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업 다각화를 서둘러 산하 물류업체는 서일본 지역에서 상위를 달리고 있다. 그밖에 부동산.서비스 업종에도 진출, 그룹의 영역을 확대시켰다.

"한국인의 피를 받은 몸으로서 1세가 키워놓은 재산을 그대로 2세가 받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2세가 열심히 해서 1세가 만든 기업에 꽃을 피워야 합니다"

그의 집은 경북 청도군 매전면에도 있고 선산에도 있다. "가능하면 자주 고향에 들러 성묘도 하려고 합니다. 선친께서는 동창천에 다리를 놓고 자신의 이름이 아니고 할아버지인 김덕길이란 이름을 새겼어요. 그래서 나도 다리를 놓으면 아버지의 이름을 넣을 것입니다"

그는 득의냉연(得意冷然) 실의태연(失意泰然)이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는 현대적인 의미의 경영 철학으로는 노력만 강조하기엔 무리가 있다며 노력을 하는 사람은 노력하고 지혜있는 자는 지혜를 내고 돈도 노력도 지혜도 내지 않는 사람은 땀을 흘려야 한다며 이러한 모든 것이 모여서 기업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동안 선친으로 부터 그룹을 물려받은지 10년, 김사장은 기업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혈육이라도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회사 물려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부친의 인정을 받은 셈이다.

김사장이 경영권을 인수한 후 이제 교에마론그룹은 해외 현지기업을 포함하면 1만명 내지 8천명 정도의 해외 직원이 있고 자본금 22억 7천만엔의 거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김사장은 고향에 대한 관심도 깊어 오사카 경북도민회 부회장으로서 이의근 경북지사와 자주 만나 고향 발전을 위한 일에도 나서고 있다. 그는 한일관계에 대해 "역사를 보면 우리가 당했던 시절에 억매이지 말고 과거에 졌으므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자신이 별도로 경영하는 일본식 주점에서 김사장과 마주 앉았다. 그곳에는 온갖 직업의 사람들이 김사장의 팬으로서 몰려들어 얘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다양한 의견들을 경청해 사업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얻은 영감으로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 기타연주까지 담당한 시디를 만들었다며 곧 발매 기념 콘서트도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김사장의 21세기 포부는 앞으로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에 오직 최선을 다하고 재일동포의 기업기반 구축을 위해 100억엔대의 동포기업들을 모아 1조엔대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朴淳國사진부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