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12월1일 호주 멜버른올림픽 경기장.
'손기정의 신화를 다시 한번'을 외치는 까까머리 청년이 있었다. 대구 영남고에서 막 서울 양정고로 옮긴 이창훈. 고교생으로 올림픽 마라톤에 첫 출전 기록을 세운 흥분과 함께 스승이자 후일 장인이 된 손기정에게 우승을 선사하려는 각오까지 겹친 탓인지 그의 스타트는 매우 힘찼다. 사력을 다했지만 결과는 4위.
그렇지만 온 국민은 그의 선전에 박수를 보냈다.
그로부터 1년5개월이 흐른 1958년 5월29일 제3회 도쿄아시안게임 6일째. 30도를 넘는 도쿄국립경기장에는 8만의 관중이 마라톤 우승자를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마침내 이창훈이 맨 먼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골인과 동시 이창훈은 그대로 쓰러졌다. 손기정의 신화를 상기시키는 장한 모습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아시안게임 마라톤 첫 금이었다. 그의 활약상은 당시 교과서에까지 소개됐다.
경북 성주군 선남면이 고향인 이창훈(64). 그는 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 마라톤선수로 당시 육상계를 주름잡았고 그 뒤 선수생활을 은퇴, 90년대초까지 지도자와 체육행정 실무자로 한국마라톤 발전에 초석을 쌓았다.
이창훈은 영남중.고시절부터 각종 중.장거리 대회서 두각을 나타내며 손기정의 눈에 들었다. 특히 55년 전국체전 마라톤대회때 비록 5위에 그쳤지만 그의 역량에 반한 손기정이 스카웃해 56년 서울 양정고로 전학, 중앙대를 거치면서 이창훈은 본격적인 지도를 받았다. 손기정은 외동딸을 그에게 시집보낼 만큼 이창훈을 아꼈다.
이창훈은 56년 대구 단축마라톤을 시작으로 우승행진을 계속해 멜버른올림픽 4위, 제3회 도쿄아시안게임 우승, 59년 제1회 한국 국제 마라톤대회 한국신기록 수립 등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서 20위의 저조한 기록에 그치자 올림픽 월계관의 꿈을 접고 64년 제1회 동아마라톤대회 우승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은퇴후 한국전력 육상부 코치(65년)를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에 들어선 이창훈은 제19회 멕시코올림픽대회 육상선수코치.대한육상연맹전무.86서울아시안게임 육상훈련단장.마라톤강화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마라톤에 대한 애정은 90년 북경아시안게임 마라톤 이원탁우승과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황영조우승의 결실로 이어졌다.
鄭仁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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