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이문칼럼-홍명희의 생가와 문화유산 보존

충북 괴산의 한 산기슭 언덕 위에 자리잡은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洪命喜)의 생가는 이백몇십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조선조의 유서깊은 가문의 전형적 큰 기와집이다. 그 구조적 아름다움은 자연적 배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미학적으로 한결 뛰어나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전통적 가옥은 비어있는 채로 무성한 잡초 속에서 폐허에 가깝도록 방치되어 있다. 이대로라면 머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긴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이지만 우리에게는 유형적이건 무형적이건 볼만한 유산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전통 문화유산의 빈곤한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임꺽정'작가의 생가는 미학적으로만 아니라 두가지 점에서 문화적으로 귀중하다.

외국에 가면 오백년, 천년, 몇천년이 넘는 건축물들이 아직도 허다하며, 도시에서는 많은 이들이 백년, 이백년이 넘는 집에서 현대적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에는 전국을 돌아보아도 천년, 오백년이 넘는 건축물들이 거의 없고, 백년이 넘는 가옥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우리 건축문화를 대표하는 전통적 기와집들은 전국 어디를 가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옛 한옥들, 특히 시골 지방에 있는 옛기와집만을 보아도 역사와 전통을 의식하고, 고향의 따뜻함을 체험하게 되는 원인과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리 문화유산의 빈곤의 원인은 많은 동란과 경제적 빈곤에서 찾을 수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문화적 유산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에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문화유산의 이러한 사태에 비추어 볼 때 3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갖는 홍명희의 생가가 소중한 건축문화유산의 하나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문제의 한옥은 물리적인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 한옥의 문화유산적 가치의 소중함은 소설 '임꺽정'을 창작한 작가의 생가라는 점에서 한결 더 증폭된다. 이 소설은 한국 근대문학의 금자탑일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사에 우뚝 선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이념적 및 사회적 차원에서 미친 영향만이 아니라 순수하게 문학적 차원에서 본 가치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도의 문학성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이 이데올로그(이념가)나 문학인 만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에 의해 언제나 애독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웅변으로 실증해 준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은 홍명희의 생가가 아직까지도 거의 폐허상태가 되어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이보다 더 수치스럽고 한탄스러운 것은 이러한 상황을 정당화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부측의 변명이다. '임꺽정'의 저자가 월북한 좌경작가라는 사실이 당국이 대는 이유이다. 이러한 변명은 무지하고 옹졸한 태도를 노출한다. 이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극단적 대치상태에서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불안에 싸여있던 지난 군사정권 때는 어쩌면 변명이 될 수 있었을는지 모르나 모든 월북작가들의 문학작품은 물론 마르크스의 서적들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고 북한에 대한 햇빛정책을 택하고 있는 국민의 정부하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문학작품 '임꺽정'은 정치이념인 주체사상은 물론 사회주의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설사 그런 관계가 있다치더라도 문학적 가치와 그 작가의 이념적 타당성과 인간적 가치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홍명희의 생가는 반드시 보수되고 보존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얼마 되지 않는 건축문화재의 재발굴, 보수·보존은 국가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의 의무이다.

포항공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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