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토출신 재일동포들(11) 김재하 의사회 상임고문

재일한국인 의사회의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상임고문직을 맡고 있는 김재하(金在河)씨는 75세의 고령에도 교토(京都)시에서 아직 의료현장에 근무하는 현역이다. 일본의 가장 유명한 천년의 유적지라면 우선 교토시가 거론된다. 약 1천200년전 일본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오사카(大阪)에서 쾌속열차로 약 30분이면 도착한다. 도시 전체에 문화재가 산재해 있고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교토에서 택시기사에게 김재하씨가 병원장으로 있는 사이쿄(西京)병원을 물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재일한국과학기술자협회의 중앙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동포사회에서 과학기술계와 의료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24년 경북 상주군 청리면에서 출생한 그는 경북중을 졸업하고 해방 2년 전인 43년 도일했다. 교토의과대학에 입학해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모두들 귀국길에 나섰으나 그는 의학도의 길을 걷기 위해 남은 학업을 마치기로 했다. 조선인 유학생회 관서본부 위원장을 맡고 가난한 한국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알선하는 등 동포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백방으로 뛰었다.

교토의대를 졸업하고 수련의까지 마친 그는 1952년 국가고시에 합격, 의사자격을 취득했다.

1953년에는 교토에서 미보진료소를 개원했다. 일본말이 서투른 한국인 환자들에 대해 일본인 의사들은 진료를 꺼렸다. 그후 이 진료소에는 많은 한국인 환자들이 몰려들어 작은 한국 사회를 이루기도 한 이 시설은 일본에서 한국인이 세운 첫 의원으로 민족의료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들을 진료하면서 교토의과대학에서 10년간 소화기외과를 전공해 196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속 10년간 흉부질환연구소에서 폐외과를 전공해 일본서도 알아주는 권위자가 됐다.

그후 미보진료소에 환자가 늘어나자 마츠이(松井)병원을 개원했다. 1972년 미보병원과 마츠이 병원을 통합해 종합병원격인 지금의 사이쿄병원을 만들었다. 1975년에는 교토 구조(九條)병원, 82년에는 교토 오조(五條)병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해 현재는 그 지역에서 병실 400개가 넘는 명실공히 한국인 병원그룹을 세운 셈이다.

3명의 아들들도 모두 의사가 돼 각각의 병원에 근무하며 동포들의 진료에 힘을 쏟고 있다.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그는 동포들과 관련된 각종 사회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그가 창립을 주도한 재일한국과학기술자협회는 조국의 과학기술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재일동포 과학기술자들의 위상을 높였다.

일본내에서 8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이 협회는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각종 학술발표회를 개최해 과학기술 발전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그는 남북의 과학기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협의하는 자리를 상설기구로 만드려 하고 있다. 그가 1983년 이 학술대회를 통해 발표한 '간염의 실태와 대책'은 한국의 간염 퇴치 뿐만 아니라 세계의 간염퇴치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B형간염 퇴치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정부는 5년동안 1조2천억의 비용으로 전국민 모두에게 B형간염 예방접종을 실시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때 그가 제시한 방안은 보균자 어머니로부터 출생하는 어린이들만 예방접종을 실시하는 것으로 차세대의 간염을 근원적으로 막는 방법이었다. 그의 주장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모두다 예방접종을 한다면 될것이라는 생각은 그럴듯하기는 하나 선조로부터 내려온 기존의 보균자들이 많은 현실에서는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몇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며 우리나라로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에게도 예방 주사를 맞혀야 한다. 앞으로 외국인들은 한국인을 상대하지 않으려 할 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건복지부와 의협 등의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조용히 공개토론을 요청했고 서울에서 학자들과 토론회가 열린후 그의 방법이 정부 정책으로 채택돼 간염 퇴치의 궤도를 수정하게 했다. 그 정책은 WTO에 의해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의 간염퇴치 방안으로 채택됐다. 이 제안이 공적으로 인정돼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그후에도 그는 차별받는 동포들을 위해 민족의료를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을 병마에서 구해내는 등 평생의 공적이 인정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한편 동포들을 위해 민단 간부로서도 활동했다. 1991년 민단교토지방본부 단장을 맡은 그는 임기중에 조총련과의 화합과 공동행사를 성공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1994년11월 교토건도(京都建都)1천200주년 행사에 지역 민단과 조총련이 공동으로 참가해 시가 퍼레이드를 펼쳐 갈채를 받았다. 이국땅에서 갈라져 살고 있는 민족의 화합을 위한 거보였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언론들도 크게 보도했다.

그는 민단 지방본부 단장의 입장으로 조총련과 협상, 100년에 한번씩 열리는 가장 큰 문화행사에 민족이 하나가 되고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늠름한 모습을 일본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한민족의 위상을 높였다는 것이다.

1995년 1월 고베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민단지방본부 단장으로서 긴급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인도적 입장에서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구호활동에 들어갔다. 의연금 모금에 있어서도 민단 방침에 따른 할당액 3배에 가까운 성금을 모금, 전달했다. 또한 재일한국인의사회에서는 신속히 현지에 의료센터를 설치하고 효고현 민단 강당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부상자에 대한 무료진료를 실시했다.

고령에도 직접 병원일을 하는 그는 지역사회단체 등 10여개 각종 단체를 통해서도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상주군 청리면에서 의사의 꿈을 품고 도일해 소원을 이뤘으나 이제는 어려움에 빠져있는 동포들을 돌보며 여생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朴淳國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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