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탈주의 시대

코뚜레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는 틈만 있으면 사람의 통제에서 도망치려 한다. 고삐가 놓이면 뒷다리를 쳐들고 내리 달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길 아닌 논밭에 들어가 곡식 농사를 망쳐놓기도 한다. 주인이 고삐를 잡아매려고 애쓸수록 소는 더욱 기를 쓰고 도망간다. 이는 자유의 갈구며 야성의 발로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작정 탈주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 고삐 풀린 소처럼 탈주의 폭풍 전야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반복되는 일상을 위반하고 환상적인 꿈의 세계로 달아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逸脫)은 원점으로 복귀하려는 구심력에 의해 제어됨으로써 금방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마음대로 날뛰는 소의 고삐를 잡아 말뚝에 매어두면 그 소는 방금 전 자신의 광란의 질주를 금방 잊어버리고 주인에 순종하는 자세로 한 곳에 가만히 서 있다. 그러나 세기말을 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불어닥친 탈주는 일상의 권태에서 오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개를 알리는 신호인 듯하다.

우리는 그 동안 중심을 설정하고 그 중심에서 위로 축적하고 옆으로 확장하는, 근대의 원칙과 가치를 신봉해 왔다. 성장과 발전이 끝없이 지속되리라는 환상을 안고 더 쌓고 더 넓히려는 욕망을 낮추어 본 적이 없다. 이제 쌓아 올린 탑이 너무 높아 벽돌 하나 더 얹는 것조차 힘들 뿐 아니라, 잘못하다가는 그것이 무너질 수도 있는 지경에 와 있다. 또 넓은 영토를 지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경계선 너머 적으로부터 저격 당할 위험이 항상 있다. 언제든지 빨리 도망갈 준비를 해야 한다. 빨리 도망가기 위해선 몸이 가벼워야 한다.

지금 근대라는 이름의 원칙과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새로운 세기에는 그 원칙과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질 것이다. 가야할 방향조차 모르는 채 그저 관성에 의해 도망칠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 나락에 빠지는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 이 가벼움과 자유여, 그리고 허무여!

신재기.경일대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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