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술산책-최고의 행운아 피카소

미술사에서 파블로 피카소(1881~1972)만큼 행복한 일생을 보낸 화가가 또 있을까. 그는 회화, 판화, 도예 등 각 장르에서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한 것은 물론 재능을 바탕으로 생전에 엄청난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사망한 후에야 추앙받던 기존의 미술 거장들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행운아'인 셈이다.행(幸)인지 불행(不幸)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여성 편력면에서도 피카소는 보통 남성이라면 당연히 '행운'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나이, 결혼 여부를 가리지 않고 셀 수 없이 많은 여성들과 사랑에 빠졌고 또 헤어졌던 그는 사랑과 이별의 과정에서 용솟음치는 격정을 그대로 작품에 옮겼다. 연인이 바뀔 때마다 작품에 변화가 생겨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고국인 스페인에서 천재성을 인정받고 파리에 왔던 무명화가 피카소는 친구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의 자살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청색 시대'로 접어든다.

가난, 친구의 죽음이 그로 하여금 푸른색을 주조로 외롭고 헐벗은 이웃들의 모습을 우수에 찬 시선으로 그려내게 만든 것이다.

이런 작품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 페르낭드 올리비에. 비오는 날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피카소는 그녀를 정신적 안식처로 삼아 조금씩 명성을 쌓아갔고 이로인한 행복감은 '장밋빛 시대'로의 진입을 예고한다. 우울한 느낌의 청색은 캔버스에서 밀려나고 아름다운 장밋빛과 즐거운 어릿광대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타고난 바람둥이 피카소는 얼마후 폴란드 화가 루이스 마르쿠스의 애인 마르셀 훔베르와 또다시 사랑에 빠지면서 '종합적 큐비즘'시대로 접어든다.

작품마다 '나는 에바(마르셀의 애칭)를 사랑해' '나의 고운님' 등의 문구를 써넣으며 사랑을 불태웠지만 병약한 마르셀이 죽자 몇 달 지나지 않아 그의 사랑은 아름다운 발레리나 에바 코클로바에게 옮겨간다.

그녀와 결혼해 아들까지 낳으면서 그의 작품은 사물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이것도 잠시, 46살의 나이에 17살의 소녀 마리 테레즈를 육개월간 쫓아다닌 끝에 그녀의 사랑을 얻어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화가로서 명성이 높아갈수록, 피카소가 연인을 갈아치우는 주기는 더욱 짧아져 마리가 그의 딸을 낳기 무섭게 도라 마르를 만난다.

마리와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아 도라와 마리가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지만 피카소는 자신의 바람기 때문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도라를 모델로 삼아 '우는 여인'을 그리는 잔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사랑은 물론 상대의 슬픔과 분노까지 작품의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이후 그가 바람둥이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만은 괜찮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피카소에게 예술적 영감만을 불어넣어주다 버림받은 여인들과 작품의 변화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지루할 정도.

오히려 모든 여성을 굴복시켰다는 자만심에 빠져있던 피카소에게 충격을 줬던 프랑스와즈 질로의 이야기가 신선하게 느껴진다. 부와 지적 능력을 갖춰 피카소의 다른 연인들과 달리 독립할 힘이 충분했던 그녀는 피카소가 자신만의 남자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미련없이 그를 떠났다. 한 번도 버림받아 본 적이 없는 피카소는 욕설을 퍼부으며 자살하겠다는 위협도 했지만-그때도 피카소는 자클린 로크라는 젊은 여성과 몰래 동거중이었다- 그녀는 과감히 떠났다. 이 사건으로 피카소는 홧김에 두달간 거의 180여점의 드로잉을 그렸다니, 그가 사랑과 이별을 예술의 원동력으로 삼은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 하다.

피카소는 그토록 많은 연인을 갈아치우면서도 원망은 커녕 태양처럼 숭배를 받았고, 심지어 사망이후 한때 연인사이였던 마리 테레즈와 자클린 로크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대적인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金嘉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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