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상공인들이 고국에 투자하는 것은 한국인이라는 자긍심과 조국애를 갖게 하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한은행 이희건(李熙健.82) 회장은 재력을 가진 재일동포들을 국내 투자에 동참시킴으로써 후대에까지 고국과의 연고를 만들어 주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왔다.
일본 오사카에서 만난 한 경제계 인사는 이 회장이야 말로 많은 재일동포들이 차별의 설움을 딛고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결실을 안심하고 고국에 투자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재일동포 사회의 가교이자 대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방 후 10년이 흘렀을때 일본땅에 정착하며 사업을 키워보려는 동포들은 일본 사회의 차별속에 제도권 금융을 이용할 수 없는 것이 큰 제약이었다.
"아무리 좋은 사업 구상을 해놓아도 자금을 빌리지 못했고 조금만 융통이 되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업도 한국인이므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필요한 사업자금을 빌려줄 수 있는 민족 금융기관인 오사카흥은을 설립한 것이지요"
지금의 간사이고깅(關西興銀)으로 바뀌게 되는 오사카흥은의 설립 당시에는 민족금융기관이 절실했던 많은 동포 상공인들이 출자자로 참가했다.
오사카흥은은 사업자금을 빌리지 못해 이리저리 애타게 뛰어다니던 동포들에게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동포사회 발전의 기수가 됐고 타지역에도 민족금융 신용조합이 생기도록하는 데 결정적 역할도 했다.
이 회장은 이렇게 해서 많은 동포 기업가들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이들의 고국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재일한국인 고국투자협회'를 만들고 회장을 맡았다.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되자 고생끝에 돈을 번 재일동포들이 금의환향해 창업하는 등 투자를 했다. 그러나 고국의 실정을 잘 모르고 사업을 맡겼던 사람들과의 분쟁 등으로 실패, 대부분 실망만 느끼고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그 처방으로 고국투자협회를 만들고 투자상담, 분쟁조정, 관계당국에의 진정 등 말하자면 해결사 역할을 했다.
이 회장은 해방 직후 젊었던 시절 그때도 해결사 역할을 하며 동포들을 위해 헌신한 적이 있다.
지금은 국내 굴지의 은행 회장으로서 동포들의 대부로 살고 있지만 그의 첫 일본생활은 가난과의 투쟁이었다. 경북 경산 압량면에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를 마친후 가난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 일본인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18세의 나이에 혼자서 현해탄을 건넜다. 당시의 고생은 누구나 마찬가지였으나 어려움이 극심했다. 물건 배달, 가게 점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명치대학 전문부를 나왔다. 해방 후에는 그는 재일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오사카 츠루하시(鶴橋)시장의 번영회장을 맡았다. 해방됐지만 고국으로 돌아갈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동포들을 위해 손발이 될 것을 결심했다. 동포 사이의 분쟁 해결, 세무관계 등 일본 당국에게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일까지 도맡아 해결사 역할을 해냈다.
동포들을 위한 그때의 활동들이 지금은 형태가 다르나 그는 민족 금융기관을 설립해 사업자금을 빌려주고 다시 이들 기업가들이 번돈을 고국에 투자토록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재일동포들의 고국투자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박정희 전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끈질기게 건의해 1977년 단자회사 제일투자금융이 문을 열었다. 동포들의 고국투자가 늘어나자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간은행의 설립안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재일동포들의 힘을 모아 은행을 설립키로 했으나 어려움은 수없이 많았다. 소액출자자들은 차별을 참아내며 힘들게 번돈을 십시일반으로 출자해 이를 모아 1년만에 신한은행 출범의 매듭을 지었다. 그는 은행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주주들 중에 많은 비상임이사를 두었다.
신한은행은 초고속 성장을 계속했다. 250억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해 첫해 1천800억원에 불과하던 수신고가 1996년 4월에는 16조5천억원을 기록했다. 신한증권, 신한생명보험 등 여러 계열사를 두고 있는 신한은행은 1994년 세계유수 금융전문지 '유로머니'가 선정한 세계 50대 우수 은행 중 22번째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88서울올림픽이 확정됐을 때 재일한국인 후원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아 540억원을 모금해 고국에 전달하고 개인적으로는 20억원을 희사했다. 현재 이회장은 2002년 월드컵 경기를 위한 후원회 회장을 맡고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1992년에는 대일무역적자를 보다 못한 그는 '바이 코리언 용기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그는 한국상품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오사카시에 약 500평의 상설 직매장을 마련하고 재일동포들을 상대로 모국상품 구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회장은 재일동포들의 문화행사에도 전폭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1990년 부터 시작된 '사천왕사 왔소' 행사를 오사카에서 해마다 개최하고 있어 동포들의 자긍심을 높여오고 있다. 한반도의 문물이 일본에 전래되는 과정을 재현하는 이 축제는 약 40억엔의 경비가 소요되는데 오사카흥은에서 20억엔을 내고 오사카 지방 동포 실업가들이 모금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행사에 많은 일본인들도 참가해 양국 공동축제로 발전돼 오사카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그는 80이 넘은 지금도 재일한국인 신협 회장 등 많은 직책을 맡고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1970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그후 영남대에서 명예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광역시와 경산시의 명예시민이기도 하다. 朴淳國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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