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들은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 외에도 일본 전역에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재일동포 사회에도 그 지역 조직을 이끌어가는 큰 기둥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있다.
이상경(李相慶.68) 이와테(岩手)상은 이사장은 동포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반평생을 바쳐 전 재일동포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도쿄 경상북도 도민회 사무국을 통해 소개받은 이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일본 동북지방의 대표적인 도시이며 이와테(岩手)현청 소재지인 모리오카(盛岡)시로 향했다. 쾌속열차인 신간선 맥스호로 도쿄에서 2시간40여분 거리였다.
그의 첫인상은 깡마른 체구에 강단이 있어 보였으나 그의 대화속에는 겸손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젊은 시절 갖은 고난을 헤치고 오늘이 있도록 살아온 인생 경험으로 생긴 여유와 삶에 대한 초연함이 엿보였다.
그는 현재 연 3백억엔의 매상을 올리는 유한회사 고락(公樂)의 대표로서 파친코를 비롯한 관광 스포츠 레저시설 등 26개의 업소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 시절의 얘기를 묻자 "그 당시에는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나요. 내가 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지요"라며 해방되고서도 18년이 지난 다음에야 처음으로
고향인 경북 의성군 비안면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의성을 떠나 일본땅에 온 것은 아직은 일제 치하에 있던 1944년, 13세때였다. 논밭 100마지기를 농사짓던 그의 모친은 공부하러 가겠다는 아들의 청을 들어줬다. 그러나 우선 호구지책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은 막노동일도 하고 고물장사도 했다고 털어놨다. 한번은 인근의 철물점 주인이 파친코 영업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일본 전역을 돌며 어렵게 일해 푼푼히 모은 돈으로 기계를 현금으로 구입했고 경험도 없이 교토(京都)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개점후 보름이 되자 고객은 한명도 오지 않았다.
무일푼이 된 그는 당시 교토에서 큰 사업을 하던 전 상주 출신 정휘동씨의 도움을 받게 됐다. 그는 정씨의 고물상에서 고용인으로 일한적이 있는데 직원을 10명을 써야 할 일을 이씨 혼자서 해냈다고 한다. 골목을 누비며 고물을 모으는데 처음에는 수치심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때 온 몸을 던져 일하지 않으면 일본에서 먹고 살기 어렵다며 독려하는 정씨에게 많은 인생철학을 배웠다.
그는 지금도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각 체인점을 돌면서 업무를 맡아본다. 젊은 시절의 고생탓인지 지금은 건강이 좋지않아 그의 아들들에게 많은 업무를 이양했다.
일본 이와테현은 인구 130만명으로 북해도에 가까운 동북지방에 자리잡고 있다. 과거 이곳에 거주하던 동포들 간에는 민단을 중심으로 반목이 심했다. 82년5월 민단 단장에 출마한 그는 5분간 허용된 입후보자 공약발표시에 '깨끗한 민단을 만들겠다'는 단한마디만 하고 단상을 내려왔으나 결과는 압승해 동포사회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민족교육의 보급을 위해 먼저 발벗고 나서기도 했다. 20여년전 재일동포들의 자녀 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이오테 한국학원의 원장으로써 많은 학생들이 일본인 학교에 가는 것을 보다못해 적령기의 어린이가 있는 가정을 직접 방문, 학생들을 모았다. 그래도 부족하자 자신의 버스에 과자를 가득싣고 직접운전하면써 지방 전역을 돌았다. 4년간 학원장이 직접 이같이 노력하자 학교는 정상 궤도로 돌아갔다. 또 한번은 재일동포들의 조직인 상공협동조합의 누적 적자가 3천만엔에 달했을때 자신의 모든 영업소의 담당자들에게 부탁해 바닥에 떨어진 파친코 볼들을 주워모아 이를 활용했다. 시간은 걸렸으나 이 아이디어로 궁지에 몰린 상공협동조합을 구했다. 그는 이어서 재일동포 상공회의소가 모은 2천300만엔의 기금을 자신이 사용하면서 일본에서는 획기적인 12%의 금리를 통해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민족교육의 보급과 탄탄한 민족재산을 구축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이러한 동포와 관련된 제 단체들이 들어갈 새로운 한국회관을 건설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건설위원장으로 취임했다.
민단 단장으로서 그는 동포들의 구심점이 될 이 건물을 짓기위해 다양한 아이디어와 자신의 희생으로 모리오카(盛岡)역 부근 요지에 건물을 완공시켜 지금도 이와테 상은신협과 민단지부 사무실이 입주해 있다.
그에 대해 주변에서는 사장이기도 하면서 카리스마는 엿보이지 않으나 난국에 처해도 피하지 않고 조용하게 솔선해서 일을 처리하고 있어 '저음 무공해의 불도저'라고 별명을 붙였다.
어느 정도 재력을 가지게 된 그는 일본의 버블경제의 영향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은 신용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게 됐다. 대출금 약 17억엔에 불량채권이 6억2천만엔에 달했으므로 동포 경제인들은 내용을 알고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단장의 사명과 민족금융기관의 재건을 위해 민단단장과 상은 이사장의 이중의 굴레를 쓰게 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 이와테 상은은 빈사상태의 중환자에서 건강체로 변신했다. 그동안 불량채권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방법을 강구하다보니 반감을 사게된 사람들은 밤마다 전화를 걸어 '죽여버리겠다'는 공갈을 계속해 시달리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상은 창구에 식도를 든 강도가 침입했고 이를 지키려는 직원들은 이에 저항해 강도를 격퇴했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직원들의 애사심에 대한 지역의 평판은 더욱 높아지기도 했다.
주변의 일본인들은 우직하나 정직한 그에 대해 일본인들에게까지도 많은 호감을 주고 있다며 이러한 면이 한국 의성에서 나온 진짜 양반이라고 말했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대수술을 받은 그에 대해 주위의 동포들은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오래오래 건강하기를 빈다"고 입을 모은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