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신춘문예 동화 당선작-아버지의 열쇠고리

신문보급소의 문이 열립니다. 미정이는 신문뭉치를 들고나옵니다. 진눈깨비가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진눈깨비를 헤치고 웃음소리 하나가 날아옵니다.

"엄마, 저 거 사줘. 응?"

빨강 털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웃으며 말합니다.

"저 인형? 그래, 그래. 사주고 말고"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갑니다. 미정이는 부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습니다. 주머니에서 열쇠고리 하나가 손에 잡힙니다. 볼품없는 열쇠고리입니다. 열쇠고리를 몇 번 만지작거리다 주머니에 넣어둡니다. 미정이는 신문뭉치를 들고 서둘러 발걸음을 뗍니다. 그 발끝에 깡통 하나가 걸립니다. 미정이는 깡통을 힘껏 걷어찹니다. 깡통은 큰 원을 그리며 공장 담을 넘어갑니다. 순간, 미정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누렁이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누렁이는 마음에서 사납기로 소문이 난 개입니다. 잠을 잘 때는 주인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으르렁, 윙윙윙!

누렁이 짖는 소리가 담을 넘어옵니다. 누렁이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누렁이의 주둥이에 박힌 날카로운 이빨이 눈에 선합니다. 미정이는 냅다 뛰기 시작합니다. 신문 돌리는 일은 뒷전입니다. 구멍가게도 반점도 그냥 지나칩니다. 가구공장까지 단숨에 다다릅니다. 뒤가 조용합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발걸음을 멈춥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누렁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미정이는 가구공장에 신문을 넣습니다. 공장 안을 흘끗 쳐다보는 미정이의 얼굴에 그늘이 집니다.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걸어나올 것만 같습니다.

"아니야"

미정이는 고개를 흔듭니다. 집을 나간지 1년이나 되는 어머니가 공장에 있을 리 없습니다.

공장을 넘기기 전까지 미정이네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장이 호랑이 아저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손에는 술병이 쥐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넘겨준 가구공장에서 날품팔이를 했습니다일 년 전, 성탄 전날이었습니다. 일을 하러 간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술타령과 손찌검이 어머니를 집 밖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들꽃 같은 미소가 그립기만 합니다.

미정이는 동네 뒷산 밤고개를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고갯마루에 있는 바늘공장이 신문을 넣는 마지막 집입니다. 미정이는 밤고개에서 교회를 내려다봅니다. 교회 지붕에는 아롱다롱 예쁜 전구들이 반짝거리며 달려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성탄절입니다. 미정이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갑니다. 가구공장 앞으로 난 도랑을 건넙니다. 미정이는 도랑을 건너며 공장을 넘겨주던 날을 생각합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도랑을 넘고 있었습니다.

덜커덩 덜컹.

트럭이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 어머니의 손에서 열쇠고리가 떨어졌습니다. 차가 멈추기도 전에 어머니는 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어머니는 맨손으로 도랑을 뒤졌습니다. 열쇠고리는 다시 어머니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공장열쇠를 끼우던 열쇠고리였습니다. 아버지는 놀란 눈으로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여보, 열쇠고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열쇠만 있으면 공장을 다시 찾을 수 있잖아요"

어머니는 열쇠고리는 생명처럼 소중한 물건이었습니다.

미정이는 그냥 지나친 반점에 신문을 넣습니다. 그리고 구멍가게에 들어가 어묵을 하나 사가지고 나옵니다. 동전하나가 미정이에게는 큰돈이지만 누렁이에게 당할 것 같아 어쩔수 없었습니다. 누렁이가 있는 공장 앞으로 조심조심 다가갑니다. 열린 공장 문 사이로 배를 깔고 누운 누렁이가 보입니다. 미정이와 누렁이의 눈이 딱 마주칩니다. 누렁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댑니다. 미정이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어묵을 던집니다.

"누렁아, 미안하다. 이거 먹고 이제 짖지마"

미정이의 목소리가 떨립니다. 누렁이는 코를 킁킁대더니 어묵을 덥석 물어 삼킵니다. 누렁이의 꼬리가 금방 살랑거립니다.

미정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갑니다. 마침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집니다. 조금만 더 내리면 눈사람을 만들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힘든 하루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대문을 엽니다. 마당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습니다.

"어디 가서 뭐 하다 이제 와!"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미정이를 맞이합니다. 아버지가 들고 있는 술병이 사납게 흔들립니다. 술병에는 술이 없습니다. 미정이는 화난 아버지의 눈빛이 무섭습니다. 술만 마시면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아버지는 오늘도 그랬습니다. 꼼짝 않고 서 있는 미정이에게 술병이 날아옵니다. 몸을 뒤틀며 날아온 술병이 미정이의 손등에 부딪힙니다. 미정이의 무릎이 눈 위로 푹 꺾입니다. 꽁꽁 언 손등에서 피가 흐릅니다. 선홍빛 피가 하얀 눈 위로 떨어집니다. 미정이의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마루에서 일어납니다. 아버지는 맨발로 단숨에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늘 술에 취해 비틀대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손이 미정이의 손목을 움켜쥡니다. 아버지는 약상자를 꺼내와 손등에 약을 발라줍니다. 늘 초점이 없던 아버지의 눈에 빛이 보입니다. 신기하게도 손에 난 상처가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열쇠고리 하나 못봤니? 어제까지 있었는데…"

아버지는 느닷없이 열쇠고리 이야기를 꺼냅니다.

"열쇠고리는…"

미정이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대문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대문밖은 금방 기척도 없이 조용합니다. 미정이는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내봅니다. 다 필요 없다며 열쇠고리를 마당으로 내던진건 아버지였습니다.

미정이는 잠자리에 듭니다. 문풍지가 흔들립니다. 성탄절 노랫소리가 철썩대며 문턱을 넘어옵니다.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눈꺼풀 위로 하나, 둘 별이 내립니다. 별들은 하얀 눈송이가 되고, 하얀 눈송이는 커다란 눈꽃이 됩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아버지는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 못합니다. 아버지 어깨 뒤로 누렁이가 보입니다. 누렁이의 입이 아버지를 삼킵니다. 성난 누렁이는 커다란 입을 벌려 미정이에게로 달려듭니다. 누렁이의 시커먼 목구멍이 어둡고 긴 터널로 변합니다. 미정이는 그 터널로 들어섭니다. 차갑고 캄캄한 터널 저 편에 희미한 빛이 보입니다. 터널 끝을 향해 힘껏 달려갑니다. 희미하던 빛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미정이 얼굴로 쏟아집니다. 미정이는 너무 눈이 부셔 터널 끝에서 쓰러집니다.

미정이는 식은 땀을 흘리며 눈을 뜹니다. 네모난 방에 어둠만 가득합니다. 아직도 캄캄한 터널 속에 갇힌 듯 무서움이 올라옵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습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다 덮습니다. 그 때입니다.

덜컹덜컹.

미정이는 덩컹대는 소리에 눈을 부릅뜹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소리가 난 방향을 찾습니다. 대문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습니다.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로 나갑니다. 분명 술에 취한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버지는 항상 쾅쾅거리며 문을 두드리기 때문입니다.

"누구세요?"

미정이는 마당으로 내려서며 나지막한 소리로 물어봅니다. 대답대신 대문만 계속 덜컹거립니다. 미정이는 조심조심 빗장을 엽니다. 대문이 삐거덕 열립니다. 하얀 얼굴이 나타납니다. 하얀 얼굴을 가진 그 사람은 여자입니다. 여자는 마당에 두 발을 들여놓습니다. 마당에 들어선 그 여자는 눈보다 더 가볍게 보입니다. 여자는 미정이를 당겨 품에 안습니다. 여자의 품에 안긴 미정이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미정이는 여자의 얼굴을 어디서 본 듯합니다. 여자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납니다. 여자는 미정이의 차가운 뺨에 입맞춤을 합니다.

"미정아!"

여자의 젖은 목소리가 미정이의 가슴에 뚝 떨어집니다. 그 여자는 그렇게 보고싶던 어머니였습니다. 미정이의 볼에 눈물이 주룩 흐릅니다.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흰 눈밭입니다.

그 때입니다.

저벅저벅.

골목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커집니다. 미정이의 가슴이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해댑니다. 어머니가 또 도망가실까 걱정입니다. 미정이는 눈을 반짝 뜨며 손을 주머니에 넣습니다. 미정이는 열쇠고리를 꺼냅니다.

"어머니, 이거"

미정이는 어머니의 손에 열쇠고리를 건넵니다. 가로등 불빛이 열쇠고리를 환희 비춥니다. 어머니의 젖은 눈이 동그랗게 커집니다. 어머니는 열쇠고리를 받아 쥡니다.

덜컹!

대문이 열립니다. 비틀대며 들어올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마당으로 들어선 아버지는 비틀대지 않습니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발견합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봅니다. 미정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봅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쏟아지는 눈송이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입니다.

"추운데 들어가자"

먼저 입을 연 아버지의 목소리는 술에 취해 있지 않습니다. 포근하고 아늑한 옛날의 목소리입니다.

"이 열쇠고리 때문에…"

어머니는 열쇠고리를 아버지에게 건네줍니다. 열쇠고리를 주고 받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습니다. 미정이는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꼭 감습니다. 긴 터널 끝에 보이던 밝은 빛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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