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쪽으로 간 사람들을 위하여

지난 연말, 많은 사람들이 동쪽으로 갔다. 동쪽의 바다, 동쪽의 산에서 새 천년을 시작하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제 새 세기의 첫 해가 떠오른 지도 1주일이 지났지만 동쪽으로 가던 사람들의 가슴에는 그 설렘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을 것이다. 해돋이가 주는 이미지를 말하라면 '희망' '정열' '생명' '힘' 등과 같은 단어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동녘의 해돋이는 언제 어디서 보아도 생명력 넘치는 활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다.

◈해돋이는 언제나 생명력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난 세기 내내 해돋이 보는 정신과 의지로 살아오지 않았는가. 이러한 정신과 의지로 살아왔기에 어느 정도의 물질을 구하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반면 우리 사회는 중상과 음해와 거짓과 배신과 요령과 부정으로 얼룩져 있다. 중상과 음해로 남을 짓밟아 놓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거짓과 배신으로 남을 속이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거침없이 남을 파괴한다. 이런 모습이 현재 우리의 초상화가 아닌가. 해돋이의 눈부심이 우리의 모습을 일그러지게 하지나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해돋이의 눈부심으로는 찾으려는 세계의 본질을 바라볼 수 없다. 지나친 눈부심은 시력을 잃게 할 뿐이다.이제 해돋이 앞을 떠나야 할 때다. 문득 달맞이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이 달맞이는 해돋이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우선 해돋이의 밝음은 눈으로 느낀다면 달맞이의 훤함은 가슴으로 느낀다. 해돋이의 따뜻함은 감각으로 느낀다면 달마지의 포근함은 마음으로 느낀다. 해가 돋을 때,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며 양팔을 높이 쳐든다. 그렇지만 달이 돋을 때는 조용히 눈을 감고 경건하게 합장하는 자세가 된다. 이렇듯 해돋이와 달맞이는 사뭇 대조적이다.

◈달맞이에는 사뭇 경건함이

그만큼 이 두 자연 현상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가짐도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 세기 산업화를 거치면서 우리는 어느새 이 달맞이를 잊고 있었다. 오로지 해돋이만이 전부였던 것 같다. 그만큼 우리는 편향된 가치관속에 갇혀 살아왔던 것이다. 동쪽으로 쏠려 있었던 것이다.

잊고 있었던 달맞이를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구태여 달맞이까지 되찾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가야 한다. 서쪽으로 가서 저무는 해를 보아야 한다. 사실 1999년 12월31일 아침에, 한 무리의 사람들은 동쪽으로 가고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저무는 해를 보기 위해 서쪽으로 갔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서쪽으로 가자. 그리고 저무는 해 앞에 서보자. 그러면 석양이 만들어내는 노을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일 것이다. 아름다운 노을을 남기고 사라지는 해를 보면 소멸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저무는 해는 내일 아침을 위하여 사라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노을을 바라보며 소멸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깊이 울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멸의 미학도 볼줄 알아야

그리고 동쪽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죽음을 비로소 보게될 것이다. 그렇다. 가슴 설레며 맞이한 금세기는 우리들 모두가 지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세기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알게된 자신의 죽음 앞에 잠시 멈칫거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내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스스로 깨달은 죽음은 두려움으로 오지 않고 삶의 질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서 속에서 우리는 헛됨이 아닌 소멸,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아름다운 소멸을 꿈꾸게 될 것이다. 석양이 노을을 남기고 사라지듯, 그런 아름다운 소멸을 꿈꾸게 될 것이다. 이 꿈은 새로운 가치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길을 일깨워 줄 것이다. 석양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의 심지에 불을 붙여 줄 수 있을 것이다. 해돋이의 눈부심으로 잃었던 우리의 시력을 회복하자. 그리하여 맑은 눈으로 잃었던 우리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서쪽으로 가자. 새로운 정신의 지평은 서쪽에서 열리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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