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시형칼럼-골목에 아이들은 없고

방학이 시작되었는데도 골목에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눈이 와도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의 함성을 들을 수 없다.

몇해 전만 해도 방학이 되면 골목엔 아이들로 넘쳐났다. 어디 숨었다 한목에 나온 건지 갑자기 골목은 아이들의 함성으로 넘쳐났는데. 이제 골목은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 썰렁하기만 하다. 우리 아파트에도 놀이터에 아이들이 사라진 지는 한참이나 되었다. 다들 어딜 갔을까? 어딘가 불안하다.

인터넷.사이버.하이테크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이대로 괜찮은 건가. 텅 빈 골목을 보면서 걱정이 된다.

온종일 컴퓨터 게임에 빠진 아이가 신기한 듯 바라보는 부모도 많다. 미래 사회의 선두주자로서 흐뭇한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하긴 누구라 감히 이 거대한 세기의 흐름에 반기를 들 수 있으랴. 이 물길을 피해갈 순 없다. 우리 아이들도 여기에 잘 적응하여 앞서 가는 인재로 길러야 한다. 미래의 싸움은 인터넷 사각링에서의 혈전이다. 지금부터 잘 훈련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니 그럴수록 우리가 그리고 아이들이, 살아있는 그리고 생생한 느낌이 있는 한 인간이란 사실을 잊게해선 안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친구와 어울려 낄낄거리는 시간이 얼마나 우리 인생에 소중한가를 가르쳐야 한다.

얼마전 뉴스엔 장애아 친구에게 끔찍하고 잔인한 짓을 한 중학생들이 경찰에 잡혀왔다. 저 불쌍한 친구를 어떻게 저럴 수가? 사람들은 치를 떨었다. 하지만 막상 린치를 가한 녀석들은 태연했다. 그냥 그래봤다는 것이다. 그리곤 수갑을 차고 히히덕거리는 녀석들을 보며 우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 왕따, 학교 폭력만이 아니다. 지존파에서 막가파, 광란의 질주, 총기 난사….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밀레니엄의 희망찬 깃발 뒤에는 이런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컴퓨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고 있다. 얼른 생각에 온 지구촌이 연결되는 것 같지만 그건 사이버 세계의 환상일 뿐 실제로는 하나하나 모래알처럼 떨어져 있게 만든다. 사무실 직원은 온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업무 수행에 아무 지장이 없다. 누구 한 사람 만나지 않고도 사회생활이 가능하게 만든 게 컴퓨터라는 괴물이다. 홈쇼핑, 재택근무자도 늘고 있다. 이젠 아예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아이들도 친구가 없다. 아니 친구가 필요없게 되었다. 게임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괜히 말썽꾸러기 친구가 왜 필요하겠어. 혼자 말썽부리지 않고 잘 지내니 엄마로서도 다행이다. 불행히 온종일 게임에 빠져 있으니 현실과 가상의 구별이 안되는 혼란 상태가 온다. 정신도 멍해진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이런 상태가 오래 가면 소위 애퍼시(APATHY), 무감동 상태가 된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좋고 나쁘고의 판단마저 흐려진다. 물론 겁도 없다. 이게 컴퓨터가 만든 현대인의 정신병리적 비극이다.

산업혁명 이래 제기되어 온 인간 소외는 이제 그런 말조차 사라졌다. 고전이 된 '군중 속의 고독', 이젠 그 고독마저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종의 인간이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햇빛이 귀찮아 살인을 저지른 까뮈의 이방인이 이젠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 이웃에, 어쩌면 우리 집 안방에 그런 싹이 트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아이들에게 친구를 돌려주자. 골목 동무를 찾아주자. 놀이터에 다시 아이들 함성이 들리게 하자. 눈싸움 하는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하자. 그리하여 아이들이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인간이게 하자.

성균관대 교수.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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