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토출신 재일동포들-박찬문 소설가

일본 오사카(大阪)지역을 중심으로 문단활동을 하고 있는 소설가 박찬문(朴贊文.73)씨는 인기작가는 아니지만 꾸준히 신작을 발표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경북 문경군 산북면에서 태어나 16살때 아무런 연고도 없이 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와 오늘이 있기까지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은 그대로 소설의 소재가 되고 있다.

1989년 발표한 단편소설 '최후의 병정 연습'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빚어진 6.25전쟁에 대한 비난의 감정이 내포된 내용이다. 전쟁 당시 오사카 상과대학 1년생이었던 그는 일본에서 한국전선으로 이동돼 가던 병참 물건중 무기를 실은 열차를 폭파시키는 계획 즉 '수이다사건'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후 이를 소설화했다.

또한 고향의 5촌아저씨를 등장시켜 자신이 다니던 보통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엮은 '환상의 나라'는 96년 9월 문예지 '분가쿠 와카기(文學若樹)'에 실려 호평을 받았다.

그밖에도 '청춘군상', '곤야쿠와 풍선폭탄' 등 피억압 민족의 설움을 소설화해 민족혼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계속 발표해 왔다.

어린시절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박씨는 교육열이 강한 집안 분위기에 따라 문경 산북면에서 예천공립보통학교를 다닌 후 김천고보 입학시험에서 낙방했다. 1년간 재수를 하고 서울 휘문고에 응시했으나 또다시 떨어지자 보통학교 일인 교장이 "자네는 실력은 있으나 과거운이 없다"며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지방 이토(伊都)중학교를 추천했다.

16살의 나이였으나 학교에 입학된다는 것이 마냥 좋아서 혼자서 관부 연락선을 탔다. 흰 두루막을 입고 학생모자를 쓴 차림이었다. 아침에 시모노세키(下關)항구에 내려 하루 종일 열차를 타고 오후 6시경 오사카역을 거쳐 와카야마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경. 초봄의 추위에다 하루종일 긴장한 그는 무조건 불빛이 보이는 역앞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여관의 여주인이 한복차림인 그를 보고 나도 조선사람이라며 단팥죽을 끓여줘 일본의 첫밤을 안도감속에 맞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일본 수학기는 98년 발표한 그의 소설 '수치의 족보'에 그대로 기술돼 어린나이에 보고 느낀 당시 일본의 모습과 나라 잃은 굴욕의 경험들을 그려내고 있다.

중학 5학년 때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해방되자 극도로 혼란해진 사회상으로 졸업을 반년 남겨두고 집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수 없게 됐다. 신문배달이나 구두닦이, 가정교사 등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고생만 죽도록 하고 돈은 되지 않았다.

'궁즉통'인가. 당시 관서 학생동맹에서 어려운 동포 고학생들을 돕는다는 소문을 듣고 교토(京都) 사무실에 가니 식량과 군대 구제품인 양복도 주었다. 이런 방법으로 우선 연명을 하며 오사카상과대학에 입학했다.

한번은 학비를 벌기 위해 그당시 학생들사이에 유행하던 쌀 암시장 매매를 하기도 했다. 암시장에서 쌀장사하는 할머니에게 지역별 시세차이를 이용, 옮겨주고 차익을 남기는 것이다.

당시 쌀 한말에 교토는 천원이나 오사카는 천백원이었으므로 학생 정기 통학증을 이용, 무료로 전철타고 왔다갔다 하며 100원씩의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커피 한잔에 20원일 때 하루 한번 100원 벌면 큰 돈이었다. 한번은 욕심을 내어 두말을 어깨에 메고 가다가 순사에게 걸렸다. 마음씨 좋은 검사가 자신도 고학을 했다며 물건만 압수하는 형식으로 사유물 포기각서에 도장찍고 풀려나기도 했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뒤 1955년 민족 금융기관으로 오사카 흥은이 생기고 첫 직장으로 입사했다. 그 당시 조총련계에서는 북한쪽의 지원을 받아 신용조합 설립에 박차를 가해 22개나 만들었다. 그러나 민단쪽은 10개 밖에 없었다. 60년에는 신협의 구심점이 될 조선인 신용협동조합 협회가 생기고 이를 조직화하자 박씨는 우리말을 아는 관계로 사무국장으로 초빙됐다.

그는 80년이후 금융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버블경기의 하락과 함께 부동산의 가격하락으로 이를 담보로 융자내서 사업을 하던 그는 큰 실패를 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간사이(關西)지방의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오사카 문학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좌절의 고통을 소설 창작의 열정으로 승화시키며 13년간 연구과에서 문학수업을 받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년의 전통을 가진 오사카 문학학교는 일본의 유명한 작가인 초대 학장 오노도사부로(小野十三郞)가 창설 기금을 내어 '분가쿠 와카기(文學若樹)'라는 동인지를 발간하고 있다.

그밖에도 많은 한국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문예지 '쥬린(樹林)'도 발간하고 있다. 박씨는 최근 '쥬린'지에 수치의 족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자신의 본명 박찬문이 니시무라 후미오(西村文雄)로 창씨개명돼 참담했던 어릴 때의 기억을 고백하고 있다.

유명한 작가 와타나베 구치고는 아사히(朝日)신문 문예평을 통해 박씨의 이 소설은 소박한 서술형 문장이나 창씨개명으로 이름을 빼앗겨 치욕감을 느낀 소년의 복잡하고 통열한 심정을 가슴저리도록 잘 표현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박씨는 15년전 고 심재인씨가 회장으로 오사카 경상북도 도민회를 설립하자 사무국장으로써 고향 사랑 운동을 벌이고 동포들을 위해 봉사하기도 했다. 현재 오사카 경북도민회는 오사카시 츠루하시(鶴橋) 부근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정기적인 모국방문, 자체 친목행사, 2세 3세 결혼추진 등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박씨는 지금도 창작활동을 계속하면서 일본의 많은 정기 간행물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민족 차별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고 있다. 박씨는 "글 내용이 조금이라도 일본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내용이 나가면 그날은 하루종일 일본 우익 집단들의 전화공세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는 "그래도 글 쓰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지금은 웃어 넘길 정도로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朴淳國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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