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이후 한신대가 발굴하고 있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안에서 한성백제(BC 18~AD 475년)의 왕궁이나 백제 시조 온조왕이 아버지 동명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인 동명묘터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가 나타났다.
또한 이곳에서는 이와같은 대형건물이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형 암키와와 벽돌, 우물 정(井)자가 새겨진 토기조각을 비롯한 각종 토기, 대형 건물의 구조물이었던 목재가 일시에 불타내려 앉아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꺼운 목탄층이 발굴됐다.
이는 풍납토성이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한성시기 왕궁이 있던 왕성이 어디냐를 두고 벌어졌던 국내학계의 기나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음과 아울러 그동안 한국고대사학계에서 신화, 전설, 혹은 조작이라고 몰아붙였던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하는 일대 쾌거로 평가된다.
12일 현장에서 개최된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안 경당지구 유적발굴조사 임시지도위원회는 무엇보다 이제는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하던 시기(BC 18~AD 475년) 왕성이 어디였느냐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더 이상 소모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줬다는 점에서 일단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최근 몇년 동안 진행된 이 일대 발굴을 통해 풍납토성이 백제 왕이 거주하는 왕궁이 있던 왕성이라는 사실은 거의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 한신대 발굴에서 대형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대형 석조구조물이 드러나고 앞서 백제가 이미 한성백제 시기에 봉건 제후제를 실시했음을 알려주는 대부(大夫)라는 명문이 적힌 토기가 출토된 것은 이곳이 백제 왕성터임을 확정해준 셈이다.
사실 이곳이 한성백제 왕성터라는 주장은 고고학자인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지난 20년 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왔으나 철저히 외면당했다·그가 이렇게 홀대받은 이면에는 한국역사학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학맥이 작용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아직 발굴이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성벽 바깥쪽을 둘러 거대한 연못,즉 해자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됐다.
문제는 과연 이런 성벽 규모가 백제 초기사 규명과 어떤 관계를 가지냐는 것이었다·여기서 풍납토성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즉 문화재연구소 발표가 사실이라면 백제는 이미 서기 200년 즈음에는 이렇게큰 토성을 축조할 정도로 강력한 왕국이었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다다르게 된다.
이는 곧 백제가 BC 18년 위례성에서 건국했으며 이미 시조 온조왕 당시에 지금의 경기도 일대와 강원도 일부를 장악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도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고대사학계는 '일본서기' 연구에서 얻은 이른바 이주갑설(二周甲說)이니 하는 '찌꺼기'를 동원해백제본기 초기기록을 아직도 신화니 전설이니 조작이니 하면서 몰아붙이면서 "풍납토성이 곧 백제본기 초기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그러나 현재로서는 거대한 풍납토성 축조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삼국사기밖에 없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삼국사기를 팽개쳐 버리고 한반도 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중국인 진수라는자가 머나먼 북중국 어느 땅에서 책상위에 앉아 긁적거린 '삼국지' '위지 동이전'으로는 도저히 풍납토성과 이를 축조한 백제의 힘을 설명할 수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는 기원후 3세기말까지 아직도 원시미개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의 전신인 사로는 겨우 삼한 78개 국가의 하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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