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토출신 재일동포들(16) 유한영 아시아관광 회장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로 그동안 1위였던 하와이를 제치고 한국이 앞질렀다. 최근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9월까지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이 160만명에 달해 142만명으로 줄어든 하와이를 제쳤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이 일본인 해외관광 선호지역 1위가 된 이유로는 원화 약세로 값싼 여행이 가능하기도 했지만 관광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꾸준한 노력도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도쿄에서 20여년간 대한여행사를 경영하며 수많은 일본인들의 한국관광을 주선했고 재일동포들의 모국 방문행사를 도와주며 묵묵히 일해온 유한영(柳漢英.75)씨는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이 고향이다.

"내가 처음으로 대한여행사를 개업했을 때는 도쿄에서 한국인 경영하는 여행사는 없었어요. 따라서 일본 최초의 한국인 여행사라고 할 수 있지요"

개업 당시에 그는 이미 많은 사업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해 온갖 인생의 풍상을 겪었으므로 여행업무에 마지막 혼신의 힘을 기울이며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들어가는 아웃바운드,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단체 관광오는 인바운드, 재일동포 단체들의 정기적인 모국방문 여행, 일본인과 한국인 구별없이 세계각국으로의 여행 알선 등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래서 그가 방문한 나라는 세계 45개국에 달한다.

도쿄의 번화가인 유락쵸(有樂町)소재 한국관광공사 건물에 나란히 사무실을 두고 해마다 황금연휴가 되면 밀물 처럼 몰려드는 일본인들의 한국 관광 주선에 밤낮을 잊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에 따라 한국업자들이 몰려와 수많은 군소 여행사들이 생기고 덤핑 경쟁과 각종경비 부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지고 IMF의 간접 영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대한여행사의 이름이 부담스러워 덤핑 경쟁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엄청나게 값싼 가격의 여행 상품을 팔아서 질낮은 서비스와 계약 위반 등으로 일인들로 하여금 한국의 이미지를 흐리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양심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잠정적으로 대한여행사의 문을 닫고 지금은 친구와 함께 아시아관광의 회장으로서 아직도 여행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

한편 그는 동포들을 위한 향수를 달래기위해 재일본 안동향우회를 결성하여 일본전국에 300여 가구의 회원 가입을 받아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 그는 16년간 안동향우회의 회장을 맡아오다가 지금은 명예회장 역할을 하고 있다.

도쿄의 신흥 번화가인 이케부쿠로(池袋)부근에 있는 안동향우회 연락처이기도 한 아시아관광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얼굴은 70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곱게 빗어넘긴 백발은 많은 풍상을 겪은 그의 내력을 짐작게 했다.

1924년 안동군 하회마을에서 서애의 15대손으로 태어났다. 가난과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고 16세때부터 대구의 장유공장에서 일 했다.

1944년 20세가 되자 당시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일본군대로 징집됐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본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전쟁이 끝날때 까지 버티었다. 해방 되던 날 그는 도쿄 근교인 우츠노미야(宇都宮)시에서 군복을 벗을 수 있었다.

그는 우선 호구지책으로 교토(京都)에서 직물공장에 다니며 돈을 모아 자신이 직접 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라 특히 생필품의 제조업은 착실히 성장했다. 10년만에 처음으로 고향 하회마을을 찾아 부모와 상봉하고 땅도 집도 사들였다.

그는 일본에서 번돈을 본국에 투자키 위해 구로공단에 입주해 삼화합자공업사를 열었다. 그러나 공동 경영의 형태인 이 회사는 5년후 부실기업으로 찍혀 국세청으로 넘어가버렸다.

또 한번은 부평공단이 조성될 때 첫 케이스로 입주했으나 한국실정을 너무몰라 사기를 당하고 알거지가 돼버렸다고 한다.

고국에서는 실패를 거듭, 고국투자는 이제 포기를 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뒤 그는 일본 신발제품을 생산하며 다시 재기를 다짐했다.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그는 한일 양국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너무나 상대지역의 실정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보고 이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당시의 여행붐을 틈타 대한여행사를 경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중국지역을 상대로 하는 여행업의 가능성을 보고 중국 국내를 두루 다니던 중 연길에 들렀을때 조선족 청년들을 만나 그들중 7명을 일본으로 데려와 취직을 시켜주는 등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는 동포들을 위한 민단 활동도 계속해 30년전 민단 도시마(豊島) 지부 의장을 역임한 후 동경본부 부의장을 거쳐 민단 중앙위원을 역임하고 현재는 동경본부 고문직도 맡고 있다.

25년전 나고야에 있던 김윤일씨 등 재력가 몇몇이서 향수를 달래기 위해 모인 재일본 안동향우회는 추석 성묘외에도 해마다 1회씩 고향방문 행사를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향우회는 안동군청 앞에 당시에는 국내서 가장 크다는 시계탑을 세우고 소방차를 한대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요즈음의 한국 관광에 대해서 "앞으로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를 앞두고 한일간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돈 쓰러 오는 이들에게 소비할 수 있는 환경과 계약을 어기지 않는 각종 제도적 장치의 보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자신의 경험으로 봐서 "연기안나는 산업이라는 관광업은 일본 특수가 계속해서 오고 있는데 각 지방에서도 독특한 테마관광꺼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여년이 넘는 관광업무로 자신이 한국방문을 주선한 일본인들이 몇십만명도 넘을 것이라는 그의 회고는 이러한 방법도 애국하는 길임을 느끼게 했다. 이처럼 그가 살아온 길은 현장 체험을 통해 한국을 이해시키는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朴淳國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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