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도 사랑' 다시 불붙이자-(3)민초들이 지켜온 독도

정부의 무관심과는 달리 독도는 민초들이 지켜왔다. 최근 독도 사랑운동.독도 지키기 운동이 민간차원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도 이 가운데 하나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600여명은 지난 23일 울릉도를 운항하는 여객선으로 독도 앞바다 선상에서 독도주권 수호대 발대식을 가졌다.

지난해 일본인 3명이 독도로 호적을 옮긴 사실이 밝혀지면서 11월부터 시작된 극일운동시민연합의 '독도 본적 옮기기 운동'에는 현재 36가구 126명이 동참했다. 이들은 다음 달 24일 '제2의 고향 독도'방문길에 나선다.

이들에 앞서 그 옛날부터 우리땅 독도를 굳건히 지켜온 선조들의 이야기는 독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독도는 삼국시대 신라에 복속되면서 우리 땅이 됐다. 독도는 본토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진 땅이었다. 우리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 땅 독도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독도 지키기 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민족의 뿌리 지키기로 끈질기게 이어져 오고 있다.

이사부(異斯夫) 안용복(安龍福) 홍순칠(洪淳七)과 33인의 독도의용수비대가 이 땅에 없었다면 독도는 일본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이사부는 신라 내물왕의 4대손으로 지증왕 이래 법흥왕, 진흥왕 대까지 활약한 대표적인 장군이자 신라 왕실의 중신이다. 그는 '지증왕 13년(512년 음력 6월) 우산국(于山國)울릉도와 무릉(武陵)독도를 정벌했다'고 세종실록지리지는 전한다.

'우산국은 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주민들이 사나워 힘으로는 정복할 수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사자를 전함에 싣고와 위협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죽이겠다는 계책으로 마침내 신라에 복속시켰다.

조선 숙종때의 안용복은 부산 동래의 어부로 조정이 방치하고 있던 독도와 울릉도를 적극 경영한 특이한 인물이다. 1693년 안용복은 10여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출어했다. 이 때 그는 울릉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영토 침범을 문책했다. 이어 그는 '무릉.우산 양도 감세관'이라 자칭하고 일본에 건너가 시마네현 태수로부터 일본어민들의 범경(犯境)출어금지 공한을 받아와 민간활동으로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시켰다.

그럼에도 그는 조정의 공도(空島)정책(조선은 15세기초부터 죄인.부역 기피자들이 섬으로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섬을 비우는 정책)을 어기고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돼 귀양을 가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안용복의 이같은 활약 결과 일본 에도막부는 1697년 대마도주를 시켜 일본어민들의 울릉도와 독도 출입을 자진 금지한다는 서계를 부산 동래부에 보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고유영토임을 조선정부에 통보했다.

독도의용수비대장 고 홍순칠(87년 작고)은 1953년 이 시대의 마지막 의병인 33인의 '독도사수 특수 의용대'(의용수비대 명칭으로 통일)를 조직해 독도를 지켰다.

일본인들은 1950년 6.25전쟁으로 우리 민족의 혼란한 틈을 타 독도에 침입, 48년 독도 근해에서 발생한 미군기 폭격사건으로 숨진 울릉 어민들을 위해 세웠던 위령비를 뽑아내고 자기들의 영토 표시 팻말을 세웠다. 출어중인 우리 어부들이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의 방해로 어로작업을 중단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때 전쟁에 참전했다가 고향에 돌아온 홍순칠 김병렬 유원식씨 등 젊고 혈기왕성한 울릉지역 출신의 전역병들이 일본의 만행소식에 분개해고 독도수호를 위해 조직한 것이 이른바 독도 의용수비대였다.

홍 대장 등 수비대 일행은 53년 4월20일 독도에 상륙한 후 울릉도에서 운반한 목재로 10여평의 초소 1동을 손수 짓고 56년 12월 30일까지 3년 8개월동안 울릉경찰서가 지원한 박격포 1문과 포탄 200발, 직사포 1문과 포탄 30발, 중기관총, 경기관총, M1소총 20정 등 장비와 실탄 2만 4천발을 지원받아 무보수로 독도 경비에 나섰다.

수비대는 53년 6월 일본 오키 수산고등학교 연습선이 독도에 침범한 것을 서도 150m 해상에서 나포후 귀항조치했다. 같은 해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함 해구라호가 침범하자 위협사격으로 퇴함시켰으며 8월 5일에는 대한민국 영토비를 건립했다.

우리 정부는 54년 8월 15일에야 독도에 무인등대를 점등하고 이를 만국에 알렸다. 이때부터 일본의 독도 탈환 침투는 노골적으로 늘어나 23일에는 순시함 오키호를 총격전 끝에 격퇴했다. 55년 1월 21일에는 보안청 순시함 PS 9, PS 11, PS 16 등 함정 3척과 비행기 1대가 침범한 것을 총포전으로 퇴격시키는 등 수차례에 걸쳐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며 독도를 사수했다.

유원식(70.당시 교육대장)씨는 당시 "독도에는 상단부 쪽으로 올라다니는 길이 없어 한 대원이 돌산을 기어올라 60m 의 줄사다리를 늘어뜨리면 나머지 대원들이 그것을 타고 오르내렸고 식량이 떨어져 3, 4일씩 굶는 것은 예사였다"고 회고했다.

그후 66년 4월 정부는 홍 대장에게 공로훈장을, 정원도씨 등 대원 8명에게는 방위포장을 수여해 부분적이나마 이들의 공로를 인정했다. 정부는 지난 96년 4월 일본정부가 다시 독도영유권 문제를 들고 나오는 시기에 87년 고인이 된 홍 대장에게는 보국훈장 광복장을, 나머지 32명의 대원 전원에게는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절반의 대원은 이미 고인이 됐고 현재 생존자 17명도 칠순의 나이로 모두가 빈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정부차원의 생계지원대책 마련 등이 없는 상황이다.

이들 수비대가 56년 12월 우리 경찰에 임무를 인계할 때까지 아무런 보상없이 치른 민간차원의 독도 지키기는 우리 정부가 독도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할 때 역사적 평가도 달라질 것이란 지적이다.

울릉.許榮國기자

---김병열 독도 의용수비대 동지회장

"한마디로 독도를 팔아먹은 것 아니냐는 심정입니다 "

지난해 신한.일 어업협정이 발효되면서 "독도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는 김병열(70.독도 의용 수비대 동지회 회장)씨. 김 회장은 "엄연히 우리 땅인데 그 주변수역을 일본과 공동관리 한다는 것은 영토주권을 포기하는 행위"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의 53년 4월 20일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의 직책은 후방지원대장. 대원들의 생필품을 수송 공급하는 것이 주임무였지만 독도에 합류하면 근무 시간은 누구나 똑같았다고 전한다.

"봄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는 이제 당시 독도를 힘겹게 지켰던 동지들이 나이가 많아 겨울날씨에 울릉도에서 서울 일본대사관까지 찾아가기가 힘겹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동만 하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철수 궐기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이 시대의 마지막 의병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중 생존자 17명과 미망인들로 구성된 동지회 회원들은 5월 정기총회를 일본대사관 철수시위로 준비해야 할 만큼 분통이 터지는 심정이다.

김 회장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일본해상 보안청과 총포전까지 벌이면서 40여년전 사수한 독도가 지난해부터는 헛된 일을 한 것 아니냐 는 자괴감 마저 든다고 했다"정부는 일본 눈치보기식의 미온적인 외교적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강력한 대응책으로 당당한 독도 가꾸기 사업을 구상해야 합니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김 회장의 지적이다.

울릉.許榮國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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