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어둠속의 봉급쟁이(하)-화이트 칼라

김성환(가명.32.대구시 달서구 용산동)씨는 요즘'잠 못 이루는 밤'이 많다. 한창 일맛에 빠져들 4년차 은행원. 하지만 불투명한 앞날만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비전이 안 보여요. 남의 돈만 세주다 늙고 마는게 아닐까 하고…"

40대 이후 언제'둥지잃은 철새'신세로 전락할 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져든다는 그는 며칠전 대학동기가 연봉 2억원대 '슈퍼 샐러리맨'이 됐다는 소식을 듣곤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차라리 모두가 비슷하게 벌었던 몇년전의 소박한 직장 풍경이 그리워요"'넥타이 부대'가 꿈을 잃고 정신적 공황상태에 직면해 있다. 얇아진 월급봉투와 황폐한 상하관계, 전망없는 미래가 오버랩되면서'직장 탈출'을 꿈꾸는 화이트칼라가 속출하고 있다.

(주)나라넷 대표 최재곤(37)씨. 지난해만 해도 통신업체 샐러리맨이던 그는 최근 인터넷동호회 및 무선메일서비스를 제공하는 벤처기업 사장으로 변신했다. 최씨는 "관료적 사고가 지배하는 직장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창업의 길을 택했다"며 "모임을 갖는 9명의 친구중 지금까지 월급쟁이로 남아있는 사람은 단 1명뿐"이라고 했다.

지역의 중견업체 간부 김모씨(45)는 하루종일 '돈 걱정'만 한다. IMF이후 크게 줄어든 월급탓에 무려 2천만원의 빚을 졌다는 그는 "퇴직금을 받기전엔 갚을 일이 아득하다"고 했다. "20년 가까이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출근했지만 실속은 막노동꾼보다 훨씬 못해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이같은 현상은 중소기업, 대기업, 공무원 등을 가리지 않는다.

공무원 김모(43)씨는 지난달 비슷한 또래의 고시출신 공무원이 벤처창업을 위해 공직을 훌훌 털고 나갔다는 소식에 박수를 보냈다고 했다. "그의 창업을 놓고 '정말 잘했다'는게 주위 동료들의 한결같은 얘기였습니다. 공직에 더이상 미련이 없지만 뭐 할줄 아는게 없으니…"

직장을 단순한 돈벌이 장소 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팽배해 있다. 틈만 나면 컴퓨터를 켜고 주식시세를 살핀다는 한 40대 회사원은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는데 회사에 애정이 있을리 없고, 자기 살 길부터 챙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동료들로부터 끌어모은 주당 10만원의 우리사주를 1만8천주나 갖고있는 한 말단 직원이나 1만주를 보유해 구혼요청이 쏟아지는 한 여사원은 지역 샐러리맨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실정.

직장이 인간적인 정 대신 경쟁만이 존재하는 각축장으로 바뀌면서 강박감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고통받는 이들도 크게 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해마다 전국에서 500~700명 가량의 근로자가 과로사로 숨진다"며 "이중 상당수가 업무부담이 많은 40, 50대 사무직"이라고 밝혔다.

한편으론 각박한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 외국어공부, 자격증취득 등에 전력투구하는 이들이 적지않다.

"입사전 10개월간 한 인력파견업체에 사정을 해가며 실무능력을 배웠어요" 7년간의 호텔 영업직을 그만두고 지난 연말 인력파견업체'베스트 맨 파워'에 입사한 석진우(40)기획실장은 "준비하지 않는 직장인의 미래는 자연도태일뿐"이라 충고한다.

앞으로 화이트칼라 사회는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한국노동연구원 김재구 연구위원은 "현재는 순환보직을 통해 전문성없는 제너럴리스트만 양산해온 체제가 끝나는 과도기적 시점"이라며 "미래의 노동시장 수요에 부합하게끔 화이트칼라 스스로 자기계발을 통해 개인의 내재가치를 높이는 풍조가 점점 확산될 것"이라 전망한다.

적자생존의 장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몸값'을 점검해야 하는 오늘의 사무직 근로자들. 그들의 미래는 여전히 회색빛이다.

金辰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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