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쉬리'와 '철도원'

최근 일본에 상륙한 한국 영화 '쉬리'가 목하 일본 열도를 강타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씨의 기고문(8일자 동아일보)은 우리를 자못 즐겁게 한다. 지난 달 22일 일본 전국 35개 극장에서 개봉된 '쉬리'는 29일 91개관, 이달 5일엔 120여개관으로 늘어났다 한다. 현재 일본내 흥행순위는 할리우드 007 대작 '언리미티드'에 이어 2위.

◈'쉬리'는 일본내 흥행 2위

대형 극장들이 할리우드 영화에 점령당한 상황은 일본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일본 영화는 메이저 영화사가 제작한 소수의 작품 외엔 대형관 상영이 어렵고, 대다수 외국영화들은 단관 로드쇼(중소규모 극장 한군데서 장기 상영)에만 성공해도 히트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라고 한다.

아시아 영화로는 일부 홍콩 액션물이 대형관에서 상영됐던 사례 외엔 중국, 대만, 인도, 이란 영화 몇 편이 단관 로드쇼에 성공했고 한국영화로는 '서편제'가 지금까지 가장 히트했던 영화로 꼽힌다고. 이런 판에 '쉬리'가 몰고온 흥행바람은 매우 이례적일 수밖에. 공영 NHK-TV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현상'으로 뉴스 보도까지 했을 만큼 일본사회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재작년, 일본영화에 대한 1차 수입개방으로 '하나비''가게무샤''우나기'가 국내 첫 선을 보였을 때만 해도 이렇다할 반응을 얻지 못했다. 구로자와 아키라(가게무샤),기타노 다케시(하나비), 이마무라 쇼헤이(우나기) 등 국제영화계에서 인정받는 유명 감독들의 작품이며 4대 영화제 수상작들인데도 기껏 5만~6만명씩에 그쳤다. 일본 영화 수입개방에 따른 일각의 우려는 기우에 그치는 듯 했다.

그러다 지난해말 첫 사랑의 애잔함을 상큼한 터치로 담아낸 영화 '러브 레터'가 서울에서만도 70만 관객 동원이라는 빅히트를 기록하더니 이번 설에 개봉된 후루하타 야스오감독의 '철도원'도 최소한 20만명을 예상, 또하나의 히트 조짐을 보이고 있다.

◈'철도원' 또하나 빅히트 예상

그러고보니 지금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사이좋게 상대국의 영화가 각각 홈런을 날리고 있는 셈이다. 사실 한일 양국의 관계라는 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에티켓과 미소로 포장하더라도 마치 생목이라도 걸린 듯 늘 껄끄로움이 남아있는 이상한 관계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 영화 '쉬리'를 보려고 극장 앞에 길게 줄지어선 일본인들의 모습을 신문과 TV를 통해 보노라면 뿌듯한 즐거움과 함께 그들에 대해 전에 없는 친근감조차 느끼게 된다. 아마 일본인들도 '러브 레터'와 '철도원'을 보며 눈물 흘리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언론을 통해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설렘 속에 맞이한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로 전망되고 있다. 문화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나라들마다 자국의 문화를 멋진 상품으로 재창출하느라 전력질주하고 있다. 이미 총격없는 문화전쟁은 시작됐다. 그리고 그 첨병은 영화이다. 200여년의 짧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 미국이 지난 한세기 세계를 지배한 데는 영화가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시민 케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같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비롯 초호화 액션대작인 '007시리즈'와 '쥬라기공원', '쉰들러 리스트', '타이타닉' 등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할리우드 영화들. 프랑스·이태리 등 유럽국가들이 천박한 싸구려영화로 평가절하했던 미국영화들은 일시에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미국문화를 심었으며, 미국인들의 뿌리깊은 열등감을 보상해 주었다. 현재 미국의 영화산업은 640억달러 규모를 넘는 세계영화시장의 80% 이상을 점유, 군수산업에 이은 제2의 산업으로 미국의 풍요로움을 떠받쳐주는 막강한 버팀목이다. 은막(銀幕)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미국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영화라는 마이더스의 손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마음의 문 열 수 있길…

다행히 우리나라도 1980년대말부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서편제', '아름다운 시절', 최근의 '박하사탕' 등에 이르기까지 작가주의 정신에 의해 제작된 수작 영화들이 잇따라 선보여 세계영화시장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위상을 높이고 있다. 한국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일본에서 '쉬리'가 거두고 있는 상업적 성공도 우리 영화의 역량이 그만큼 커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쉬리'와 '철도원'. 지금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영화가 상대국민의 뜨거운 호응 속에 상영되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소망을 품어본다. 평행선으로 달리는 철로처럼 결코 진정으로 친구가 될 수 없었던 두 나라가 이젠 서로의 영화를 통해 마음문을 활짝 열고 오랜 응어리를 녹일 수 있었으면…. 그래서 21세기엔 함께 어깨를 겯고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친구가 되기를….

정치가 못하는 일을 아마도 영화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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