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IMF환란 곱씹기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한 해 농사를 지어 생활하고도 남을 정도이면 부유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경제발전의 첫발을 내딛었던 61년 81달러이던 한국의 1인당 GNP는 80년에는 1천592달러로 20배 늘어났다. 60년대에 비하여 소득이 엄청나게 늘어났다지만 겨우 끼니걱정에서 벗어날 정도였다. 재산은 처음에 모으기는 힘이 들지만 붙기 시작하면 눈덩이 구르듯이 늘어나는 것처럼, 89년 말에 비해 99년 말에는 부동산 등 실물자산을 제외하고 금융자산만 따져서도 한사람당 1천517만원으로 10년만에 33배나 늘어났다. 흔히 금융자산을 유동성(流動性, Liquidity)이라 한다. 경제시스템에서 물처럼 흐르는 게 있다면 돈이라는 뜻이다. 물이 한 방울 두 방울 구를 때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대하(大河)가 되면 그 위력이 도도하기 그지없다. 국민을 다스리는 치자(治者)란 물을 다스리는 자였다.

돈이 없을 때는 아주 아껴 쓰며, 늘려보려고 허욕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그만한 돈이 없어도 살아 갈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크게 불려 보려고 욕심을 내게 된다. '위험 큰 데, 이문 크다'고, 전 세계에 '고위험 고수익'을 노리고 다니는 돈이 단기투기성 자금인 헤지펀드(Hedge Fund)이다. 헤지펀드들은 국제금융시장의 자본자유화를 이용해 전 세계를 무대로 공격을 가하고 있다. 미국계 자금이지만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위원회도 그 규모가 얼마인지 모른다. 추정컨대 1천여개의 헤지펀드들이 3천~4천억 달러 정도의 자금으로 10배~30배 가까운 돈을 굴리면서,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1천억달러 이상으로 단기자본을 대규모로 이동시킬 수 있다.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들도 하루에 많아야 수십억 달러로 환율방어에 나설 수 있는 것을 감안하면 가공할 정도의 공격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국제금융시장에는 헤지펀드 외에도 미국의 연금기금(5조7천146억달러) 및 뮤추얼펀드(3조2천200억달러), 일본의 생명기금(1조7천179억달러), 영국의 생명보험(5천910억달러) 등 수십조 달러 이상의 투기자금들이 풍랑을 일으키고 있다. 99년 미국의 GNP가 7조8천억달러, 한국의 GNP가 3천200억달러 인 것을 비교하면 엄청난 돈이다. 전세계의 외환거래 중에서 무역에 따른 실물적 거래는 1.5%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돈놀이 거래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실감케 한다.

엘니뇨, 라니냐 등 기상이변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는, 하늘에는 구름이 골고루 퍼져 있어, 농사짓기에 딱 좋을 만큼 비를 내리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시커먼 구름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비를 뿌리는 곳은 물난리를 일으키고, 비켜 가는 곳은 가뭄의 재앙을 내리고 있다. 헤지펀드, 뮤추얼펀드등 먹구름이 뒤덮는 곳은 돈이 넘쳐나지만, 돈이 빠져나갈 때는 그야말로 환란을 일으킨다. 그것이 한국 및 아시아의 외환위기였다.

돈이 늘 아쉬운 조그마한 시골동네에 어느 투기꾼이 수백억대의 돈을 뿌렸다 하자. 돈이 나돌아다니니 음식점도 잘되고 술집도 흥청망청, 모든 것이 장밋빛 꿈에 부풀려 있었다. 그러나 챙길 것을 다 챙긴 투기꾼들이 잽싸게 돈을 빼내간 후에는 그 동네는 어떻게 될까? 미국의 투자기관인 골드만삭스는 99년 4월에 국민은행에 5억 달러를 투자하고 장부상이긴 하지만 같은 해 9월13일날 1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한국의 증권시장에 들어온 외국자금은 640억달러, 수일만에도 한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단기외채가 380억 달러 등 1천억이 넘는 단기 투기달러가 한국의 경제를 휘젓고 있다. 돈 규모가 적은 한국인들이 몇 명이 뭉쳐 주식을 사들이면 작전이라고 형사처벌을 받지만, 규모가 커 그 자체가 작전인 외국 투기자금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작전을 해도 당국은 멍하니 바랄 볼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무엇을 사고 파는가가 개미들에게는 주식투자의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는 서글픈 현상만 남길 뿐.

어리석은 한국인들은 외국인이 한국경제에 찔러 넣어 주는 돈이 정말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투자된 자금이라 착각하고 있다. 투기 달러는 해악만 줄 뿐 이다. 너무나 많은 달러가 들어 오다보니 환율을 낮추어 수출을 죽이고, 달러를 환전해주다 보니 통화가 늘어 물가를 부추겨 정부의 경제관리를 엉망으로 교란시켜 버린다. 그러다 낌새가 조금만 나쁘면 빠져나간 후의 경제의 황폐함이람, 그것이 어제 아래의 IMF환난인 것이었다. 착각은 자유라 하지만 착각 후 후유증은 생사의 중병이다. 한번 당해 봤으면 정신을 차릴 법도 한데 또다시 흥청거리려 한다.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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