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토출신-천수명 경북도민회 명예회장

"김소월 시인은 고향이라는 시를 통해 '생시에는 생각도 아니하던 것이 잠들면 어느듯 고향'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천수명(千水命.77) 재일본 경북도민회 명예회장은 이국 타향 일본에서 살아가는 고향사람들끼리 모인 도민회의 신년모임 자리에서 향수에 젖었다.

지난 1987년 11월 뜻있는 향토 출신 재일동포들이 모여 재일본경상북도 도민회가 결성된 지 올해로 13년째로 접어든다.

천씨는 재일경북도민회의 초대회장을 맡아 6년 동안 모임의 기초를 닦은 뒤 고향 떠난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로 조직을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 놓았다. 그는 지금도 명예회장으로서 고향돕기와 동포들을 위한 일에 앞장서며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도쿄에서 코도부키(壽)교통주식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그는 24세 때인 1946년 미리 일본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백씨를 찾아 고향인 경북 영양군 석보면을 떠나 도일했다.

그동안 농사일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던 그는 교토(京都)의 염색공장 생산 현장에서 일을 배우며 힘든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새벽 2, 3시에 깨어나 일하는 시간도 있었고 밤에는 12시를 넘겨야만 잠드는 중노동이 계속됐지요.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그때처럼 어려운 시기에 누구라도 고생 안한 사람이 있겠어요"

염색공장의 경영이 안정되자 그의 백씨인 천순명씨는 도쿄에서 자동차회사를 개업했다. 그는 부사장으로서 실질적으로 경영을 맡았다. 31세의 나이였다.

그 당시는 아직도 조센징이라는 개념의 한국인 멸시 분위가 만연해 있었다. 재일동포들은 은행 거래도 잘되지 않았고 새로운 사업의 인허가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편법으로 다른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회사를 인수해서 창업했다.

1960년 모든 허가관계를 해결하고 7대의 택시를 구비해 코도부키 교통주식회사를 개업, 독립했다. 그해는 세계적 '친절 택시'로 유명한 교토의 유봉식씨가 이끄는 MK택시회사도 처음으로 문을 연 같은 시기였다.

택시회사의 초창기 경영은 어려웠으나 모범업체로 지정되자 증차가 가능했고 이를 거듭하는 가운데 지금은 보유 택시가 70대로 늘어났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택시회사로 일본당국의 심사를 통과, 모범업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할 정도로 교통 위반을 하지 않고 당국의 규정을 따르겠다는 천사장의 의지 덕분이었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도 잊지 않았다. 그는 승객에 대한 친절은 택시회사와 기사와의 원활한 관계속에 형성됨을 알고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많은 배려를 했다.

그 당시 다른 대다수의 택시회사 업주들은 기사를 일회용 소모품 정도로 생각했고 기사들도 직장을 하루 밥벌이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이러한 가운데 승객에 대한 서비스는 있을 수 없었다.

"운수업은 일종의 공익사업인데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승객들은 서비스를 제공받고 기사들은 직장인으로서 대우를 받아야 하고 회사도 적정 수준의 이익을 내야한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입사 7년이 되는 모든 직원들에게 회사 경비로 한국여행을 시켜주고 있다. 일본인 직원들에게 회사 복지 차원에서 휴가 여행을 보내주는 동시에 한국을 이해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 회사에서 한국인은 2세 경영인인 장남과 천 사장 둘밖에 없다. 이 회사는 민간 자동차 검사장과 함께 자동차 판매업으로도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천사장은 이 회사의 연간 매출은 약 20억엔 정도라고 밝혔다.

이처럼 회사 경영에 성공한 천사장은 재일 도쿄 한국인 상공회의소의 회장을 역임한 뒤 재일상공인 연합회 부회장으로 한국인 상공인들을 위해서도 앞장서서 큰 역할을 했다. 천 사장은 이미 1964년 8월부터 2년간 이 상공인연합회의 전무이사로서 재일한국상공인들의 경제 활동에 기여했다. 당시 그는 고국의 경제인 단체들을 계속해서 일본으로 초청해 일본 경제계의 실상을 파악토록 했다.

이러한 활동이 인정돼 그는 국가로부터 1978년 5월 국민훈장 동백장, 1990년 5월에는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88년 경북도민회 회장으로서 그는 고향으로 영주 귀국하는 사할린 동포인 권재곤씨에게 지원금 500만원을 전달하고 귀국 도중 임시 기착한 일본에서의 생활을 돕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의 설움을 당해보기는 천 사장도 마찬가지 경험을 했다. 그래서 사할린 동포들의 어려움을 그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천 사장은 재일본 경북 도민회 회장 시절 기본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10여명의 재력가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아 약 4천700만엔의 기금을 예탁하고 그 이자로 모임의 운영비에 보탬을 주도록 했다. 지금까지 그는 기금으로 총 600만엔을 부담했다. 그는 지금도 고향을 찾을 때면 어릴적 영양 석보초등학교의 동창생들을 만나 정담을 나눈다.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으나 그가 지어준 모교의 옛 건물은 느티나무와 함께 말없이 교정을 지키며 고향을 찾은 늙은 졸업생을 반겨준다고 한다. 추억 때문에 그는 아직도 이따금 김소월의 시 '고향'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朴淳國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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