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씨에게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닉네임이 따라 붙는다. 미술사가 앨런 케프는 이미 60년대초에 백남준씨를 '문화적 테러리스트'라고 불렀고 지난세기 후반에는 '전자 마법사'로 대신했다. 특히 문화적 테러리스트라는 별칭은 오랫동안 따라 붙었다. 뉴욕의 거리에서 바이올린으로 해프닝을 벌이고 독일에서는 연주하면서 피아노를 부수기도 했다. 그런 테러리스트가 새 천년에 들어서자 곧장 테러리스트가 아닌 점령자로서 세계의 예술계에 우뚝 서 버렸다. ▲현대미술의 메카라는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5년이나 기획한 끝에 '백남준의 세계'라는 타이틀로 마련된 초대형 회고전을 지난주말 일반에 공개했다. 평생 실험정신과 끈질긴 도전으로 예술에 진정한 충격을 던져왔던 그는 지금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면서도 신작들을 내놓았다. 포스트 비디오라는 하이테크 영역이다. 고물TV이나 세련된 신형TV를 이용한 비디오예술에서 한발 나아가 레이저 광(光)을 소재로 한 새로운 예술세계를 선보인 것이다. ▲뉴요커들은 백씨가 이번 전시로 가장 비싼 작품을 전시하는 생존작가가 될 것이라며 흥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흥분보다 더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는 것이 있다. 수백명의 외국기자들이 모인 회견장에서 모국어인 한국말로 "이렇게 늙어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개무량하다"고 외쳤다는 점이다. 절규에 가까운 그의 외침이 너무 순수하다. ▲87년 뉴욕 소호의 오소소라는 절친한 중국인 친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인터뷰 했을 때 백씨는 대구가 경주와 해인사가 인근에 있어 꼭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 대구에는 발길이 닿지 않았다. 다만 지난해 대구에서 백남준미술관건립이 김천대 한은미 교수에 의해 추진돼 기금마련전이 열리는 등 한 때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한 교수는 백씨의 작품 약 40여점과 미술관 자리를 확보해 두고 있지만 대구와 백씨는 특별한 연고가 없다는 등 미술관건립 추진이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백씨가 대구와는 연고가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뉴욕과는 어떤 연고가 있었을리 만무하다. 미술관 건립 추진 결과가 궁금해진다.
김채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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