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해외 여행을 다녀올 때였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 기미가 보이자 우르르 사람들이 일어서서 좁은 통로를 메운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승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일어서 있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우리나라 사람 같아 보였다. 만일의 사고를 대비하여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승무원의 지시를 이처럼 대량으로 무시하는 국민은 아마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급했을까. 아니면, 남들이 일어서기에 자기도 따라 일어섰던 것일까. 비행기가 아직 활주로 위를 움직이고 있는 동안 일어서서 부산을 떠는 사람들, 그들이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사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 상당한 호소력을 갖게 된지도 꽤 오래되었다. 모 일간신문은 몇 년 전부터 '글로벌 에티켓'이라는 고정 의견란을 운용하고 있고, 최근 모 대학에서는 신입생을 대상으로 하여 '글로벌 시티즌 교육'이라는 프로그램을 시행하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세계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우리나라 안에서도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늘어났으니,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도록 하자는 이러한 움직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일각에서 주장하는 세계 시민 교육은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일례로 세계어로 대접받고 있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거나 서구식 식사 예법을 제대로 익혀야만 비로소 세계 시민의 대열에 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이처럼 남의 언어나 관습을 익히는 것 자체로 이른바 세계 시민이 될 수 있을까.
영어가 서툴다거나 서구식 식사 예법을 모른다고 해서 우리를 흉볼 사람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서투른 우리말과 젓가락질을 하는 외국인을 보며 흉볼 사람이 우리 주위에 없듯이. 아마도 우리가 흉을 잡힌다면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일테면, 승무원의 지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서는 탑승객들이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면, 한국인들은 흉을 잡힐 것이다. 또 공공장소에서 길게 늘어선 대열을 못보기라도 한 듯이 슬그머니 앞으로 끼여드는 사람이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면, 한국인들은 흉을 잡힐 것이다. 또 있다. 외국의 유물 벽면에 자신의 내방을 기념해서 낙서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면, 한국인들은 틀림없이 흉을 잡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 시민이 되기 위해서 비행기 안에서는 승무원의 지시를 잘 따라야 한다고 국민을 계몽할 것인가. 또는 외국에 나가서 새치기를 하거나 그 나라의 유물 벽면에 낙서를 하면 한국인의 위신이 실추될 것이니 그런 일은 삼가자고 국민을 계몽할 것인가. 영어를 배우고 식사 예법을 익히자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듯이, 이런 식의 국민 계몽 운동을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무엇을 지키거나 삼가자고 국민을 계몽한다고 해서 그 국민이 곧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논의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양식 있는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도록 모두가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공중도덕과 예의를 지키는 일이 중요함은 이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계화시대든 아니든, 또한 세계 어느 곳에 나가 있든 국내에 있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공중도덕을 따르고 예의를 갖추는 일이다.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최소한의 공중 도덕과 예의의 원칙을 누구나 존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