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낮은 산도 산은 산

아이젠도 없고 침낭도 없다. 산행에 필요한 장비라고는 달랑 등산화 한 켤레밖에 없다. 가장 높이 올라가 본 산이라고는 소백산 연화봉이 개인적인 기록이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오르고 싶은 지리산도 발을 디딘 경험은 화엄사나 실상사 마당에서 얼쩡거린 것이 전부다. 더 있다면 딱 두 번 차를 타고 88고속도로를 오고가며 스쳐본 게 고작이니 말해서 무엇하랴.

사실 나는 산보다는 물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강이나 바다도 좋지만 개울이나 하다못해 옹달샘을 보더라도 감동하는 편이니 오죽하랴. 그렇다고 산을 싫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산을 좋아하는 정도에서 물보다 덜 한 것이지 싫어할 까닭도 없다. 따져보면 대체로 물의 고향은 산이 아닌가. 다만 산을 찾는 일이 드문 것은 천성이 많이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산다운 산을 오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더러 끼리끼리 모이다 보면 산행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있다. 이름난 산 이름이 오르내리고 호불호(好不好)를 따질 때면 그저 들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잡은 고기가 크다고 으스댄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안동-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산에 대해서는 너무 모른다. 대체로 그렇다. 그럴 때면 못난 천성덕에 낮고 가까운 산을 주로 찾는 나의 산행 편력이 기를 편다. 이쯤 되면 이젠 그들이 입을 다물 차례다.

안동은 분지여서 사방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나같이 만만한 높이다. 그러나 아무리 낮고 못생겨도 있을 건 다 있다. 나무와 풀과 꽃과 낙엽, 그 사이로 난 짐승의 길에 옹달샘까지 곁들여진 그런 산행의 즐거움이 있다. 영남산, 갈라산, 학가산, 약산, 천지갑산, 덤산 등 이름만 들어도 정다운 산이다. 가깝고도 낮은 산행. 이쯤되면 그 못난 천성을 '내 고장 바로 알기'로 합리화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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