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차가운 바람 속에 잠든 듯이 보이는 느티나무 숲길을 걸어간다. 30여년을 걸어온 이 길, 하늘을 향해 모세혈관처럼 가지를 뻗은 나무들을 바라본다. 길 옆 플라타너스 꼭대기 까치집은 아침 나들이에 벌써 비어 있다.
3월이 올 때마다 1970년 봄을 기억한다.
그 해 3월은 눈발이 날리고 초조한 마음 마냥 몹시 추웠다. 처음 해부 실습을 하던 날, 그 지독하던 포르말린 냄새와 차가운 죽음의 감촉은 지금도 선연히 남아 있다.
쫓기는 일과 속에 조금씩 적응되어 가면서 나날이 마음이 메말라가던 어느 날, 무심히 쳐다본 느티나무 가지에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토록 죽은 듯 서 있던 나뭇가지에 수천 수만의 생명이 숨어있었다는 놀라움, 그리고 오월의 부드러운 바람 속에 반짝이는 잎새들을 바라보며 화려한 목숨의 환희를 보았다.
비로소 해부실습실 죽음의 짓눌림에서 벗어나며 마음 속에 샘물이 고이듯 작은 삶의 기쁨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어둠은 빛의 결핍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라야 비로소 찬연히 빛나는 빛을 볼 수 있다'는 어느 책 구절이 불현듯 생각났다. 무성한 여름이 지나고 그해 가을 쌓인 낙엽을 태우며 재로 돌아가 다시 새 잎으로 돌아오는 변함없는 생명의 순환을 생각했다. 그때부터 숲은 시시때때로 표정을 바꿔가며 많은 이야기들을 내게 해주기 시작했다.
목숨은 때로는 칡넝쿨처럼 강인하고 때로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나약하여 그저 신의 손길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허망한 날들. 고통으로 일그러진 수많은 삶과 죽음을 바라볼 때마다 늘 곁에 지켜 서서 절망하지 않게 마음의 평정을 찾아주던 느티나무 숲.
첫 햇살이 비끼는 나뭇가지가 투명한 하늘로 가슴을 열고 다시 돌아올 잎새들을 기다리는 3월의 느티나무 숲길을 오늘도 걸어 간다. 김용주.경북대 의대 교수.진단방사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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