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들면서 대학은 묵은 때를 벗고 새로운 학기를 맞는다. 지난 2월말 대학은 학업을 마친 대학생은 물론 정년을 맞은 교수들을 떠나보내고 이 달에는 새로운 신입생을 맞았다. 지난해도 대학은 여느때처럼 복잡한 전형을 거쳐 신입생을 뽑았고, 이처럼 선발된 신입생은 이제 희망에 벅차 대학의 문을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희망에 찬 3월을 맞는 대학도 신입생들의 부푼 가슴처럼 들떠 있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근년들어 대학은 어떤 의미에서건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대학내의 많은 일용잡직이 외부 용역으로 충당되고, 사무직은 전산화와 더불어 대폭 감축되었다. 한번 임용되면 정년까지 무난히 재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교수직도 이러저러한 평가제도에 의해 편한 직업이 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가 등록금 이외에 이렇다할 재원을 갖지 못한 대학의 총장과 고위 보직자들은 대외적 모금실적으로 그들의 객관적 능력을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과연 대학은 이제 더 이상 세속에서 고립된 상아탑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시장체제의 세계화가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이 IMF의 관리체제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의 대학 구조조정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200개에 육박하는 대학들 가운데 어느 대학도 세계 100대 대학의 하나로 꼽히지 못하는 우리 대학의 현실이나, 수년 이내에 다가올 대학 지망생의 절대적 부족현상은 대학의 투명하고도 합리적인 경영을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안일을 탐하는 교수들을 채찍질하면서 그들에게 충실한 교육과 훌륭한 연구업적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 대학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대학이 창업기업의 전진기지가 되어야 한다든지, 사회생활에 직접적으로 쓰임새 있고, 곧장 돈이 될 수 있는 '신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세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대학과 학문의 본령이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대학교육은 기껏 100년을 넘지 못하고, 본격적인 학문연구가 시작된 것도 겨우 반세기에 남짓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학교육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지위의 유지나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쓰여왔기에 대학이 학문발전의 온상으로 기능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의 대학은 거시적인 사회적 분업과 일정한 사회적 부의 축적으로 본격적인 학문연구의 객관적 토양이 아쉬운대로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대학을 강타하는 실용주의와 황금만능주의는 그나마 움터오르는 학문연구의 분위기를 허물어뜨리지 않을까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원래 대학의 남상(濫觴: 기원.근원)은 신학.의학.법학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출발이 실용주의에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용주의 학문도 그것의 심오한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실용성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물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이 각성되면서 대학은 순수학문을 옹호하는 사회적 기구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대학은 당장의 실용성이나 목전의 환전(換錢) 가능성이 전혀 없는, 따라서 대학이 아니면 보호될 수 없는 연구나 학문분야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그의 사회적 책무를 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대한 대학정책은 장기적으로 보아 한 사회나 인류의 균형적 발전을 위한 가장 굳건한 보루가 되어 왔던 것이다.
필자는 새 학기를 맞아 대학에 들어오는 신입생들에게 대학과 학문의 궤적이 반드시 직선만이 아니라고, 따라서 우회로의 선택이 반드시 악수(惡手)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자리를 빌어 넌지시 귀띔하고자 하는 바이다.
정문길 고려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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