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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대입논술-쟁점리뷰(욕망과 쾌락)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며 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쾌락을 얻으려고 한다. 즉, 삶을 위해 필요한 사물을 획득하려고 하고, 쾌락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이러한 욕망과 쾌락은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자극하는 추진력이 되기도 하고, 인간을 망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욕심을 줄여라, 지나친 쾌락에 빠지지 말아라'라는 훈계를 금언으로 삼아왔다. 왜 욕심을 줄여야 하고, 쾌락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가? 오히려 무언가를 욕망하며 쾌락을 얻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정말 욕망 없는 인간,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인간이 가능할까?

서양의 욕망론은 대부분 플라톤의 '향연'에서 그 원초적 단서를 찾는다. 얼핏보면 '향연'은 에로스(eros), 즉 사랑이라는 주제를 놓고 전개되는 것 같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야기의 전개과정에서 인간 욕망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사랑에는 반드시 어떤 대상이 있다. 남자가 여자에 대해, 여자가 남자에 대해, 사람이 동물이나 식물, 또는 돌 같은 어떤 무생물에 대해, 어떤 이데아에 대해서처럼 사랑은 그 대상을 가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랑은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객체인 대상을 갖고자 하는 나, 즉 주체의 욕망이다. 내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자 할 때, 나는 그 대상을 가까이 끌어당겨 소유하거나 얻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려 하는가? '향연'에 나오는 다음 대목을 먼저 읽어보자.

원래의 인간은 지금처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 이 둘을 다 가지고 있는 제3의 성(남녀성)이 있었다. 그 때 사람의 모양은 아주 둥글었는데, 등과 옆구리가 둥그렇게 삥 둘러 있었다. 그리고 팔이 넷, 다리가 넷, 둥근 목 위에 머리는 하나였는데, 거기에 얼굴이 반대 방향으로 둘 있었고, 네 개의 귀와 두 개의 음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처럼 똑바로 서서 걸었는데, 어느 방향으로든 가고 싶은 데로 걸어갈 수 있었다. 빨리 뛰고 싶을 때는 마치 공중제비하는 곡예사가 두 다리를 공중으로 쳐들었다가 저쪽으로 넘어가듯,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덟 개의 손발로 연거푸 번갈아 땅을 짚어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굴러 갈 수 있었다. 그들은 무서운 힘과 기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야심도 대단했다. 급기야 그들은 신을 공격했다. 이에 제우스와 다른 신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 대해 회의를 했다. 그러나 번갯불로 쳐서 저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신들에게 예배를 드리며 희생 제물을 바쳐 왔는데, 그들이 없어지면 신들이 막대한 손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참 후에, 제우스는 좋은 생각을 해 냈다. '우리는 인간을 그대로 생존하게 하면서도, 그들을 지금보다 약하게 하여 난폭한 짓을 그만두게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두 동강으로 쪼개자. 이렇게 하면 그들은 지금 보다 약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그 수가 늘어나서 우리에게 더 유리해질 것이다. 그후에도 난폭하게 굴면, 그들을 또 두 동강 내어 한 다리로 껑충껑충 뛰어다니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난 후, 제우스는 삶은 달걀을 머리카락으로 자르듯 사람들을 한가운데서 갈라 두 조각으로 쪼개었다. 그래서 인간은 남녀의 성이 합쳐져 있던 본래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고, 갈라진 반쪽은 각각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며 다시 한 몸이 되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인간은 원래 남녀의 성이 합쳐져 있다가 제우스에 의해 반쪽으로 쪼개졌음을 보여준다. 그 후의 인간은 모두 반 쪽의 상태이며, 이 반 쪽의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 그리움이 바로 사랑이며,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욕망의 기원이다. 제우스에 의해 쪼개진 인간은 쪼개짐으로 인해 고통과 소외, 그리고 결핍을 맛보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인간은 결핍과 상실 상태를 회복하려고 끊임없이 욕망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밑 빠진 독처럼, 채워도 채워도 다 채울 수가 없다. 이것이 인간 욕망의 특성이다.

플라톤은 인간을 결핍된 존재, 고통의 존재, 그리움의 존재로 이해하고 여기에서 인간 욕망의 기원을 찾으려고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 이후의 쾌락주의자들에 이르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욕망이 쾌락 추구에 있다고 보았다. 물론, 쾌락의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즐겁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한편, 스피노자는 욕망을 지금 현재의 나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어떤 근원적인 성향으로 보았다. 나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또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꾸준히 무언가를 만들어 가고 창조해 가는 것을 인간의 욕망으로 이해했다. 동양의 유학과 불교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동양적 욕망론은 외부의 사물을 접했을 때 일어나는 인간의 마음, 그 욕망을 잘 제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 무소유, 무욕망의 욕망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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