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복칼럼-소가 웃는 선거

우리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을 조사하면 '정당본위'가 아니라'인물본위'가 되어 있다. 정당보고 찍겠다는 것이 아니라 인물보고 찍겠다는 것이다. 최근의 모 여론조사에서도 소속정당을 보고 투표하겠다는 응답자는 20%도 안되고, 개인 인물을 보고 투표하겠다는 사람이 80%나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인물본위'의 투표 성향이다. 정말로 우리 유권자들이 그런 성향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 투표에서 그런 성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인물본위'란 우리 유권자들의'투표성향'이 아니라 대답만 으레 그렇게 하는, 한갓 '투표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 유권자들의 지금까지의 투표 행태(行態)에서 보면 절대로 인물본위로 투표하지 않는다. 투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상 인물본위로 투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후보가 다른 어느 후보들 보다 나은지 객관적으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4사람의 후보가 있을 경우 그 중 한 두 사람이 좀 처진다하는 것은 알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짐작이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설혹 안다해도 나머지 두 사람 중 어느 후보가 더 나은 지는 신(神)의 잣대를 갖다 대지 않는 한 일반 유권자들로서는 분간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유권자들의 인물비교 잣대는 예외없이 학력과 경력과 소문(所聞)이다. 학력은 어느 고등학교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이고, 경력은 대개는 어떤 전문직에 종사했느냐이다. 소문은 얼마나 청렴했느냐 사람됨이 어떠하냐 등의 평판으로 인물비교의 기준을 삼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 정확히 알 수 없고, 정확히 알 수가 없는 만큼 비교기준으로서는 허구가 된다. 예컨대 학력으로 어느 학교를 나왔다해도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 성적만 보고는 알 수가 없고, 설혹 안다해도 졸업한지 수십 년이 넘고 보면 그 동안의 변화가 학력을 의미없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경력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 자기 소임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알 수가 없고, 더구나 자기 일에서의 전문지식을 얼마나 쌓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대학교수의 경우 학생보다 지식이 못한 교수에서 교수보다 월등히 지식이 높은 교수에 이르기까지 천층만층구만층이다. 교수라고 결코 같은 교수가 아니다. 현역의원의 경우 시중의 잡배만도 못한 의원에서 양심과 양식을 갖춘 의원에 이르기까지 그 층위가 다양하기 그지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문은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처럼 네거티브 선거전을 하는 나라에선 전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악성루머라는 것이 언제나 있다.

그래서 '인물본위'로 투표하겠다는 것은 실제로 될 수가 없고, 사실상 지금까지 하지도 않았다. 이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를 오래 해온 정치선진국도 실제로는 그러하다. 다른 말로 인물본위가 아니라 정당본위로 하는 것이다. 개인 후보보다는 그 후보를 인정하고 공천한 정당을 더 믿는다는 의미이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정당이 자기 당 내의 인물을 오랜 시간에 걸쳐 검색하고 검증해서 내놓은 인물인 만큼 그 인물에 신뢰를 보낸다는 투표성향이며 투표행태다. 그래서 정당을 '민주주의의 촉진자(promoter)'며 '민주주의의 견인차(tractor)'라 한다. 그래서 또한 정당을 민주주의의 꽃이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민주주의의 정당이 없다. 민주주의를 시작한지는 50년이 넘지만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당도 없다. 심지어는 정국을 주도하는 여당이 급조된지 두 달도 채 안된다. 그 정당들이 민주주의를 한다고 떠들고 오직 우리 당을 믿어달라고 외쳐대니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누가 민주주의의 적(敵)인지 유권자는 생각해야 한다. 민주화 투쟁의 이름으로 누가 민주주의를 계속 파괴해 왔는지 유권자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누가 지역선거를 만들고 누가 돈선거를 만들고 있는지 유권자는 이번 기회에 깊이 숙지해야 한다.

연세대 교수.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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