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시형칼럼

미국 유학시절이었다. 그곳도 선거철이면 곳곳에서 유세가 거창하게 열린다. 궁금도 하고 모자나 배지 등을 기념으로 하나 얻을까 하는 생각으로 유세장을 찾아갔다. 목도 마른데 콜라 한 잔도 얻어마셔야겠다는 계산도 물론 깔려 있고.

유세장은 입구에서부터 거대한 축제마당이었다. 피켓, 모자, 배지 등 온갖 장식물들이 쌓여 있었다. 어느 걸 고를까 하고 살피는데 이게 웬일인가. 모두들 돈을 내고 사는 게 아닌가. 값도 만만치 않았다. 유세장에 나와 응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거기다 돈까지 내라니! 한국 선거판에 낯익은 나로선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엔 어느 것 하나 공짜가 없었다. 콜라 한 잔도 제법 비싸게 주고 사마셔야 한다. 더욱 신기한 일은 사람들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사들고 나와선 후보 이름을 외치며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그 넓은 유세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어느 누구도 공짜 손님이라곤 없었다. 돈을 주고 버스로 모시고 통사정을 해야 하는 우리와는 너무 딴판이었다. 그도 모자라서 점심 대접에 푸짐한 선물까지 한아름 안겨야 겨우 자리를 채워주는 게 한국의 유세장이 아니던가. 제 발로 제 돈내고 모여드는 미국시민이 부럽다.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난 그게 못내 궁금했다. 하지만 미국 친구의 답변은 아주 의외였다. "당연히 내야지. 내 심부름을 해줄 사람인데 내가 내야지 누가 내?" 그 후보와 정치적 소신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와 응원하고 선거자금도 내야한다는 게 미국 시민의 논리다. 가끔 뉴스에 보이는 그 열광적인 환호, 온갖 장식, 포스터, 피켓, 꽃가루, 깃발들이 모두 지지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부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맑은 정치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 정치를 삼류라고들 개탄한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정치인을 그렇게 규탄하고 매도할 자격이 있는가? 정치인들의 면면을 보라. 모두가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이다. 지역과 나라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그냥 허세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정치판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치인이 거짓말을 잘한다지만 누가 그들을 거짓말장이로 만들었으며, 누가 그들을 마치 부패와 부정의 원흉처럼 만들었는가?

정치 신인들이 공천을 반납한 사태가 벌어졌다. 선거꾼들이 마치 이리떼처럼 으르렁거리고 덤벼드는 통에 혼비백산하여 달아난 것이다. 벌써 선거판은 개판이 되었다고들 언론도 분개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 개판을 만들었나. 선거철이면 철새처럼 날뛰는 꾼들만이 아니다. 멀쩡한 이성을 가진 시민들까지 가세하니 문제다. 선거판이 깨끗해지지 않는 한 정치는 절대로 맑을 수 없다. 표를 쥔 유권자가 도둑질하라고 충동질을 하고 있는 한 맑은 정치는 기대할 수 없다. 어느 국회의원의 독백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린 형무소 담장 위를 곡예하듯 걷고 있습니다" 한 발 잘못 디디는 날이면 나락으로 떨어질 판이다. 무슨 리스트가 그렇게 많은지. 그게 발표될 적마다 숨을 죽여야 하는 게 정치인이다.

누가 우리 정치인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선거를 앞두고 우린 다시 한 번 냉철히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 사무실로 가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성과 열을 다해 그들을 도우자. 맑은 봉사자가 많을수록 우리 정치가 맑아진다. 그리하여 유능한 정치인이 처음의 뜻대로 청렴한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정치가 일류가 되어야 나라가 일류로 된다. 그건 전적으로 선거권자의 양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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