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막내딸에게

지금은 대학생이 된 딸애의 책상 위에 유치원 시절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액자가 있다.

하얗게 부서지는 몇 겹의 파도가 모래톱으로 밀려와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을 지우고 있고 멀리서 조개껍질을 줍고 있는 언니가 실루엣처럼 보인다.

세찬 바람에 머릿결이 흩어져 날리고 추위에 잔뜩 웅크려 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문득 처음 그 애가 태어나던 날이 생각난다.

여린 별빛처럼 반짝이던 목숨 하나가 내 품안으로 떨어지던 꿈 뒤에 영일만을 덮은 안개가 소리 없이 들판으로 밀려오고 4월의 황사바람이 천지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처음 울기 시작하면서부터 며칠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아 애태웠던 날들.

좀 마르긴했지만 잔병치레 한 번 없이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언니와도 큰소리로 다툰적도 없어 집안은 늘 평화롭고 조용하였다.

그러나 자라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삶이 어떻게 시작이 되고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바라보는 것은 늘 조마조마하면서도 즐거웠다.

내 삶이 슬프거나 고달플 때마다 나로 인해 저들의 삶이 변질되거나 때묻지 않을까 조심하다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오늘을 견디며 내일을 기다릴 수 있었다몇겹의 인연이 닿아 내게서 생명이 비롯되고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가는지를 생각하면 아이들을 바라볼때마다 모든 것이 경이롭다.

그 애 앞의 삶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지나온 날들처럼 순수한 눈빛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멀리 사진 뒤에는 세찬 겨울 파도에 완강히 버티는 바위가 보이고 파도 위를 갈매기가 유유히 날고 있다.

언제나 맞는 아침처럼 나날이 새롭게 변해 가는 아이의 생각과 외모를 생각하면서 희끗희끗 돋아나는 흰 머리칼과 지명의 주름살을 거울에 비춰본다.

언젠가 내 품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자기만의 삶을 찾아 떠나겠지만 지금 사진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처럼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경북대 의대교수·진단방사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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