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통역을 담당했던 일본인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는 안의사의 순국 장면을 기록, 문서로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이 공개한 문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旅順) 감옥에서 집행됐다.
안은 전날 고향에서 보내온 명주옷을 입고 예정시간보다 빨리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흰색 저고리와 검은 바지가 대조를 이뤄 수 분 후면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수인의 운명과 같아 보는 사람에게 일종의 감개를 느끼게 했다.
미조부치(溝淵) 검찰관, 구리하라(栗原) 형무소장, 소노키 통역, 기시다(岸田)서기가 교수대 앞에 있는 검시실에 착석하자 안이 대기실로 끌려 나왔다. 구리하라소장은 안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법원의 선고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전했다.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소장은 다시 한 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는가"고 물었다.
안은 "아무 것도 남길 유언이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은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 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간수가 반 장짜리 종이 두 장을 접어 안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씌웠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2층 집같아 작은 계단 7개를 올라가면 화로방 같은 것이 있다. 안은 조용히 걸어서 한 계단 한 계단 죽음의 길로 다가갔다.
드디어 안이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 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 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시 15분 안은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보통 사형수의 유해는 좌관(座棺)에 넣는 것이 관례였으나 안을 위해서는 송판으로 침관(寢棺)을 만들었고 시체 위를 흰 천으로 덮어 매우 정중하게 다루었다. 일단 이 관은 교회실에 옮겨지고 안이 품고 있던 예수의 상을 관 양쪽에 걸었다.
안의 공범자인 조도선(曺道先), 우덕순(禹德淳), 유동하(柳東夏) 3명은 교회실로 불려와 안의 유해를 향한 최후의 고별을 허가받았다. 세 사람은 모두 조선식으로 두 번 절을 하며 안의 최후를 조문했다. 그 들은 모두 감격한 듯했고 그중에서 우덕순은 하얼빈 이후 안중근의 소식이 끊겼는데 최후의 고별을 하게 돼 안도 만족할 것이라며 당국의 처사에 감사했다.
시신은 매우 정중한 취급을 받으며 오후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공동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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