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업주부들 힘 냅시다

전업주부 전영희(40.대구시 달서구 도원동)씨는 요즘 부부동반 계모임에 나가기가 두렵다. 맞벌이 하는 직장여성들끼리 주고받는 얘기에 자꾸만 주눅이 들기 때문이다. "사이버 증권거래로 얼마를 벌었다"는 자랑에서부터, 가족 홈페이지가 어떻고 E메일이 어떻다느니 하는 대화들…. 도무지 남의 나라 얘기만 같다. 소외감만 잔뜩 떠안고 돌아오기 일쑤.

지금은 가장 혼자 벌어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 일본 같은 나라가 옛날에 들어섰던 그 '지옥'이 드디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한 즈음. 여기다 디지털이니 인터넷이니… 도무지 따라 잡기 힘들만큼 격렬한 변혁기이기도 하다. 코스닥이니 뭐니 해서 주식투자를 모르고선 등신 취급해 달라고 사정하고 다니는 꼴이 된 세상.

이래저래 소외되기 쉬운 처지의 전업주부들이 뉴밀레니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코스닥을 모르니 남편에게 미안하고 인터넷에 깜깜하니 애들로부터 무시 당한다.

전업주부 홍나희(43.대구시 방촌동)씨는 남편 월급을 쪼개고 쪼개 알뜰살뜰 살림 꾸리느라 옷 한벌 번듯하게 사입어 본 적 없다. 하지만 요즘들어 무능한 아내란 생각이 공연스레 앞선다고 했다. 남편 혼자에게만 기대서는 될 시대가 아닌데… 괜히 불안해져 조금이나마 가계에 보탬될 일 없을까 해서 이 궁리 저 궁리 다 해 본다.

남편이 경찰 공무원인 이명자(37.대구시 상인동)씨는 전직 은행원인 친구가 코스닥 투자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는 무용담을 듣고는 부리나케 따라 붙었다. 그러나 원금 조차 절반이나 날리고는 몸져 눕고 말았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존심 마저 여지없이 구겨졌다. 한약봉지 사들고 퇴근해 온 남편 앞에서는 더욱 하릴없었다.

전업주부였던 백수연(40.대구시 수성1가)씨는 근래 지하철역 매점에 '취직'했다. "집에서 펑펑 놀지만 말고 당신도 돈 벌 궁리 좀 해보라"는 남편의 농담반 진담반에 오기가 생겨서. 하지만 자신의 빈자리 때문에 집안 분위기만 더 뒤숭숭해지는 것 같아 결혼 후 처음 해보는 서툰 출퇴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자신이 없다.

대구시 시지동에 사는 정미영(42)씨는 "다른 엄마들은 늘 인터넷으로 숙제를 도와준다"는 초교생 막내 딸아이 푸념 때문에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마음 뿐. 그동안 너무 무뎌졌는지 컴퓨터에 적응이 안된다. 한달도 못가 중도하차 하고 말았다.

맞벌이 부부 동서가 많은 전업주부들의 고민은 더 독특하다. 빠듯한 살림에 어른들께 용돈봉투 한번 시원하게 못내놓는 처지이다 보니, 명절이나 집안 대소사 때는 부엌에서 '몸으로 때우기 작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여기다 집안 일이나 아이들 문제에 조금만 허술해도 "집에서 도대체 하는 일이 뭐냐"고 남편이 짜증내는 것 같다고 했다. 자격지심 역시 만만찮은 문제.

대구시내 신경정신과에는 컴맹.넷맹 불안, 재테크와 관련한 상대적 열등감 등 때문에 소화불량.불면증을 호소하는 전업주부들이 적잖다. 최태진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적극적 자세로 시대 변화에 동참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인식의 성숙 역시 못잖게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가족 공동체 유지에 기여하는 주부들의 숨은 손길, 변하지 말아야 할 삶의 가치 등을 더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회 정신이 회복돼야 한다는 것이다.

힘냅시다 전업주부 여러분! 여러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趙珦來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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