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사마천이 그립다

TV드라마 '허준'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이미 두 번이나 드라마화된 것임에도 회를 거듭할수록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국민의 10명중 6명꼴로 이 드라마를 본다. 몇년 전의 '첫사랑'이나'모래시계'처럼 사람들은 매주 월·화요일 밤이면 '허준'을 놓칠세라 귀가를 서두른다. 이날 저녁만큼은 약속도 피한다. 술꾼들도 이 시간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지난 주말, 고려 태조 왕건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루는 대하 사극 '태조 왕건'이 첫 회를 선보였다. 이틀간 두 회가 방송됐을 뿐인데 벌써부터 시청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연전 '용의 눈물'과 최근 막내린 '왕과 비'에 이어 또하나의 사극 인기 대행진을 예고한다.

TV 뿐만이 아니다. 지금 극장가에선 한 편의 몽골영화 '징기스칸'이 막을 올렸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대제국 몽골이 낳은 정복자 징기스칸. 그의 장대한 일생이 요란한 말발굽소리 속에 펼쳐지는 영화다. 완성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선 저명인사들의 이 영화 감상이 잇따르는 모양이다.

대하 사극물이 전에없는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전세계를 오가는 이 시대, 1천여만명의 인터넷 인구가 있는 이 나라에서, 국민의 절반이상이 거꾸로 수백년전 옛 이야기에 이토록 열광적이라니….

무엇때문일까? 그냥 재미있어서?

필자는 '영웅이 없는 이 시대'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난마(亂麻)같은 이 현실에서 영웅을 갈구하는 것은 아닐까. 목 타는 심정으로, 간절하게.일제 탄압과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를 딛고 인동초처럼 살아남은 우리. 그래도 그 때는 김구선생, 안중근의사 등 대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영웅들이 있었다. 백성들은 그들을 바라보며 주린 배를 희망의 허리띠로 졸라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4.13 총선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입후보자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허리가 부러져라 절을 하고 있다. 처연하기조차 하지만 그들의 진정이 왜 가슴에 와닿지 않을까. 국민의 심부름꾼이 되겠노라는 사람들이 세금 한푼 안내고, 병역의무도 피한 무세무병족(無稅無兵族)들이 수두룩한 이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의 초중고는 대학입학이란 목표를 향해, 대학은 고시라는 골을 향해 달려간다. 거기엔 브레이크도 없다. 벤처와 증권, 고액복권의 열풍 속에서 사람들은 대박의 꿈만 꾼다. 명예와 권력과 돈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군상들이다.

요즘 우리 사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때때로 아득한 역사 속 한 인물이 그리워진다. 중국 한(漢)나라 사람 사마천(司馬遷). 5천 보병으로 흉노의 3만 기병과 싸워 이긴 장군 이릉은 한 부하의 모략에 따른 흉노군의 맹공으로 사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무제는 총애하는 후궁의 오빠 이광리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 이릉을 이광리 휘하부대에 두려 했으나 이릉이 거절, 독립부대로 출병했던터라 이를 괘씸히 여겨 그를 엄벌하고자 했다. 무제의 속뜻을 안 모든 군신들이 유죄를 주장했으나 오직 한 사람 사마천은 국가의 위급함에 몸을 바친 이릉을 변호했다. 대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사형에 처하려했다. 사형을 피하려면 50만전의 벌금을 내거나 궁형(宮刑:생식기 제거형)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가난했던 사마천은 죽음보다 치욕적인 궁형을 택했다. 5년째 집필중이던 사기(史記) 때문이었다. "사기만 끝낼 수 있다면 이 몸이 산산조각난들 후회없겠노라"던 사마천은 마침내 16년간의 산고를 거쳐 세계 역사상 최초의 통사(通史)요, 중국 정사(正史)의 첫손가락에 꼽히는 사기(130권 52만6천5백자)를 완성했다.

진정한 애국자, 참된 영웅은 자신의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는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문득 다시 사마천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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