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갓바위 오르기

들뜨고 어수선한 주말이면 나는 곧잘 갓바위에 오른다. 갓바위에는 항상 인간을 감싸는 천년 전 그대로의 넉넉함이 감돌고, 그런 넉넉함 곳곳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야단스런 준비없이도 언제건 마음만 내키면 찾을 수 있는 2km 남짓한 산길은 갈 때마다 정말 평범하지만 귀하기 이를 데 없는 지혜 두가지를 되새기게 한다. 그것은 오르는 동안의 힘겨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결코 정상의 성취감은 맛볼 수 없다, 아무리 힘들게 정상에 올랐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미련없이 내려와 다음 산행을 기약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지혜를 깨닫는 순간 짜증스럽던 일상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이 때문에 갓바위를 오르노라면 아무 연출없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한 주일 내내 무심코 보냈던 작은 일 하나하나까지 다시 새로워진다. 갓바위 오르기는 이래서 좋고, 같은 길을 몇 년씩 반복해 걸어도 싫증날 틈이 없다.##인내 없으면 성취 못해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평범한 두 가지 지혜가 사회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정치학도인 나에게 머리 속 지식과 사회현실은 이런 평범한 지혜 안에서 수시로 만나고 있다. 어저께 끝난 4·13 총선의 결과 나타난 분명한 몇 가지 사실들-여성과 정치신인의 약진, 여전한 지역대결 구도-도 딱딱한 이론적 추론을 거칠 필요없이 이 평범한 지혜만으로도 쉽게 설명이 가능해진다.

강한 것만이 아름답고, 이를 위해 남보다 항상 한 발 앞서 가야만 하는 사회에서 절망의 시대를 살아오던 여성들이 만들어 낸 '지역구 5석, 비례대표 11석 석권'이라는 빛나는 약진은 갓바위 오르기에서 배우는 지혜와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여성의원의 비율이 비록 세계 평균(13.2%),아시아 평균(14.9%)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5.9%에 지나지 않지만,273석으로 줄어든 16대 국회에서 16명이나 되는 여성이 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변화인가! 1대에서 15대를 거치는 동안 많게는 12명,적게는 1명에 불과하던 여성의원의 숫자가 16명으로 늘어나기까지, 그것도 3.7%에 불과하던 여성의원의 비율을 4년만에 5.9%로 늘리기까지, 힘들다고 포기했더라면 이런 약진이 있을 수 있었을까?

##有始有終, 有終有始

또 정상에 서 있던 정치거물들이 전국 곳곳에서 낙선하고, 김윤환 김중권 박철언 이수성씨 등 이 지역 정치거물들도 이름조차 제대로 거론된적 없는 정치신인들에게 맥없이 눌려버렸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미련없이 내려와야 하는 산행의 지혜를 보고 있지 아니한가?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극심한 지역주의도, 반대당이라면 거론조차 금하던 지난 선거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스럽게 완화되고 있는가? 대구 부산 경남북의 당선자가 한나라당 일색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틈바구니에서 10%를 웃도는 새천년 민주당의 지지자가 보이고, 비록 국회입성에는 실패했지만 진보를 내세우는 민주노동당의 약진도 보이지 않는가?

##느리지만 강한 변화의 힘

세상은 느린 듯하지만 꾸준히,굉장한 힘으로 바뀌고 있다. 새 시대 새로운 사회를 읽기 위해 나는 이번 주말에도 갓바위를 찾을 것이다. 풀어야 할 문제가 쌓여 골치아픈 정치인들, 새 시대를 맞고 싶은 여성정치인과 정치신인들도 비바람치는 날 정인(情人)을 찾듯 주말에 갓바위를 찾아 마음을 풀 일이다.

임경희(영남대 강사.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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