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토출신 재일동포들-25)전종상 회장

지금부터 30년전에는 낙후된 사회간접기반과 정국혼란이 계속됐던 우리나라로 투자하는 외국 자본가들이 크게 많지 않았다. 다만 1965년 한일회담 이후 부터는 재일동포들만 정부의 시책에 호응, 막대한 자금과 기술을 들여와 투자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선산 컨트리 클럽과 동대구호텔 등 연전개발주식회사를 경영하는 전종상(田鐘相·74)회장도 일찍부터 투자를 통해 모국진출을 시도했던 재일동포 기업가이다.

지금은 구미시로 바뀐 당시 선산군 무을면에서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던 전회장은 친척의 손을 잡고 부친이 먼저가서 살고 있던 일본으로 건너 갔다. 해방이 되자 부친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는 형님인 전택상씨와 함께 학업을 위해 남게된다.당시 교토(京都)에서 이웃에 살던 친구 2명과 같이 도쿄로 상경한 그는 메이지(明治)대학에 진학, 낮에는 학교에 가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달픈 학창시절을 보낸다.

두 친구는 유복한 집안에 형편이 좋아 저녁에는 놀기만 했고 같은 시간, 전씨는 학비를 벌기 위해 다양한 일들을 경험한다. 그는 이때 이를 악물고 고생했던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성인이 됐을 때의 사업 수완과 빈틈없는 경영을 하게되는 교훈도 얻었다고 한다. 그후 두 친구들은 성적불량으로 퇴학돼 귀향했으나 그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이때 그가 체득한 삶의 화두는 평범하기 했으나 노력과 인간관계라는 두가지 생활신조였다. 그의 이러한 두가지 삶의 자세는 일흔이 넘은 지금도 일관되게 계속돼 오고 있다.

백씨와 함께 철공소를 하며 고철을 모아 압축, 제철소에 납품하는 사업을 할때도 다른 사람들보다 두배의 노력을 했다. 지정업자가 아니었던 관계로 물건이 되돌려보내지기가 다반사였으나 끈기로 버티었다.

1958년 백씨로부터 독립해 처음으로 파친코 유기장 영업을 오사카 시내에서 시작했다. 당시 회사취직도 잘되지 않았던 재일동포들은 앞다투어 유기장 영업을 시작했었다. 따라서 전씨의 영업점 부근에는 경쟁업체들이 몰려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게됐다. 이때도 그는 두배의 노력을 거듭, 쉬지않고 일했고 다른 업체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노력과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그의 경영태도는 일본 경제 도약의 기류를 함께 타고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 지금은 빌딩 임대업, 대형서점 등 오사카를 중심으로 간사이(關西)지방에 23개 업체를 거느리게 됐다.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사업에 몰두해 온 전회장은 우연한 일로 모국방문을 결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고국으로의 투자쪽으로도 눈을 돌리게 된다.

"한번은 갑자기 허리를 다쳐 운신할 수 조차도 없어 병원에 누워있었는데 집에서 연락이 오기를 딸이 설사병으로 심하게 앓고 있다는 말을 죽은 것으로 잘못 들었어요. 부모로써 달려가지도 못한채 괴로워했지요" 이때 그는 고향의 부모를 절실히 생각하게 됐고 얼마후 어릴때 떠났던 무을면 고향땅을 찾게된다.

그후 자주 고국을 방문하는 가운데 모국투자를 결심하고 우선 동대구역 근처의 땅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벌판이었던 그곳에서 10년 동안 조각조각 땅들을 사들여 5천평의 대지를 마련했다. 그는 대구시장이었던 이상희씨와 상의한 결과 호텔을 짓기로 했고 이 계획은 현재의 동대구호텔로 결실을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에도 머지않아 골프붐이 일 것을 예상하고 고향땅에 선산 컨트리클럽도 개장했다. 이제 오는 5월에는 퍼블릭 코스도 오픈할 예정이다.

고국투자를 통한 두군데의 경영을 위해 그는 한국에 체제하는 시간도 많다. 그는 매일 오전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선산골프장 이곳저곳을 모두 둘러본다.

"지금 일본 전국에는 약 2천500개의 골프장이 있는데 한사람의 오너가 여러개의 골프장을 경영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 곳은 오너가 모든 골프장의 구석까지 둘러볼 여력이 안되지요. 따라서 클럽하우스 부근만 잘 가꿔져 있을 경우가 많아집니다.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러나 전 회장은 운동을 마친 고객들이 클럽하우스 사우나에서 예의가 없거나 낭비하는 실태에 대해서는 매섭게 지적한다.

"수건을 5, 6장씩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물을 틀어놓은채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골프를 친다면 모두가 중류층은 넘는 사람들인데 일본 골프장에서 보는 고객들의 행동과는 차이가 많아 안타까워요"

그는 고향을 위해 무을면 면사무소 건물을 지어서 희사한 적이 있다.

"한번은 무을면장 송별회때 초대받아 간적이 있어요. 그날은 날씨가 추웠는데도 당시의 면사무소 건물이 좁아서 많은 사람들이 실내로 못들어오고 밖에서 떨며 행사가 진행됐지요. 그날 나는 조그만 면민회관을 지어주겠다며 참석자들에게 약속을 했지요. 그런데 이말이 점점 확대돼 면사무소를 짓게 됐어요. 준공후 2층에는 면민회관이 들어가고 1층에는 면사무소로 사용하게 됐지요" 그후 그는 공사중 중단돼 있던 선산읍내의 군민회관도 4억원 정도를 들여 완공시켰다.

그는 국내에 투자한 사업체의 수익금은 모두 고국에 다시 투자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중 한가지로 앞으로 월드컵 행사시숙소 부족에 대비해 현재의 동대구호텔의 규모를 대폭 증축할 계획을 갖고 있다.

또 한가지 지론은 3세 이후의 재일동포 젊은이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는 가운데도 그의 2남4녀, 6명의 자식들은 모두 한국인들과 혼사를 맺도록 했다.

일본 오사카(大阪)인근 위성도시인 이바라키시에 있는 전회장의 자택으로 기자가 방문했을때 그는 집 뒤편 언덕에 한국의 흙으로 가꾼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비료와 농약을 일절 사용치 않고 음식찌꺼기들을 모아 만든 퇴비를 주며 고향에서 가져온 씨앗으로 키운 몇가지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어릴때 떠난 무을면의 추억이 생각날때면 언제나 그는 이 언덕에서 고향의 흙을 만진다고 한다. -朴淳國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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