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부분엔 아직도 썩다만 군화가...

밀고 쫓기는 아비규환의 현장. 끝모를 총성과 포연속에 한 핏줄의 젊은이들이 쓰러지며 흘린 피와 시체가 강을 만들고 산을 이룬다.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왜관쪽으로 908호 지방도를 따라 10여km를 가다 내려 도보로 40여분 가파른 산줄기를 헉헉거려 닿은 망정초교 뒤편 속칭 '숲데미산(519고지)' .

6.25 최대격전지였던 다부동 전투지역 중 한 곳인 이 일대에서 지난 3일부터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해 육군이 펴고 있는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장 일대에서는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 장면이 마치 어제 본 영화처럼 현실감있게 다가서고 있었다##조상의 시신 수습하듯

숲데미산과 한 능선을 이루고 있는 야산은 당시 369, 328고지로 명명된 곳으로 369고지 정상 부근에 도달했을 즈음 호미, 삽, 갈퀴 등으로 유해발굴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지역 부대 장병 50여명이 눈앞에 들어왔다.

막 발견한 보존상태가 비교적 완전한 유해 1구를 붓솔같은 장비로 유해에 붙은 흙을 떼어내는 장병들의 모습은 마치 자신 조상의 시신을 수습하듯 경건하고 조심스러웠다.

발부분엔 썩다 만 군화가 그대로 신겨져 있고 정강이 뼈엔 고무링으로 보이는 시꺼먼 고물줄이 아직까지 발목 뼈를 감싸고 있었다.

"아!"

유해를 수습하던 한 장병의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강이 뼈 부근에서 붉디 붉은 진달래 꽃이 머리 숙이고 있었기 때문. 못다핀 청춘을, 그래서 맺힌 한을 피빛 꽃으로나마 피워 올리려 했던가...주위엔 한동안 숙연함이 감돌았다.

##'靑松正' 글자가 선명

갈비뼈 주변엔 전사자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청송정(靑松正)'이란 글자가 새겨진 만연필 한자루가 놓여져 있었다. 또 금방 발견된 듯한 유골 조각과 군화, 탄피류 등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지난 주 328고지에서 발견된 최승갑(崔承甲)씨 유해와 유품에서도 자신의 이름 석자를 새긴 소형 삼각자와 만연필이 발견됐었다. 만년(萬年)을 쓴다해 만년필이라지만 이들은 조국을 위해 천수(天壽)조차 누릴 수 없었던 것일까.

유품으로 보아 이들은 학도병일 것으로 군 관계자는 추정하고 있었다.

"낙엽만 긁어내도 부분 유해는 부지기수로 발견됩니다. 사체 수습을 못한걸 보면 당시 접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지요"

##"유해방치 안타까워"

발굴작업을 지휘하고 있는 신금산 대위는 당시의 교전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며 치를 떨었다.

육군이 현재 발굴을 하는 곳은 석적면 망정리 328고지와 숲데미산 지역,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기준해 구안국도 왼쪽편인 가산면 유학산과 오른쪽인 다부동 전투지역 등 모두 4개소로 이 일대를 통틀어 다부동 전투지역이라고 했다.

육군은 지난 94~97년에도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펴 유해 259점을 발굴,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안장했었지만 당시 아군 전사자만 1만명이란 점을 감안할때 이 일대 야산에는 전사자 유해가 즐비할 것으로 군 관계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의 허위범(46) 총무과장은 "부분 유해가 부지기수로 발견되는 전투지역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방치해 둔 현실과 신원 확인이 안되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했다.

##2003년까지 발굴 계속

다부동전투에 참전했던 황대형(71.다부동전투회 광주지부장)씨는 "당시 1사단에 소속돼 60여명의 1개 중대 병력과 함께 전투 했는데, 50여일 동안의 전투를 마친후 생존자는 19명에 불과 했다"며 "고지 쟁탈을 수차례 반복하며 수천명이 숨진 전투였기에 전우 사체를 수습할 여유가 없었다"고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술회했다.

한편 육군은 발굴된 유해에 대해 오는 현충일에 추모 행사를 가진후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목격자 및 증언이 있으면 2003년까지 발굴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칠곡.李昌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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