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게 뻗은 가지 사이에선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고, 맑은 공기가 대기에 충만해 사람과 자연이 순수로 만나는 녹색 공간. 그 곳에다 일생을 묻은 채 청산을 가꾸는 이가 있다.
독림가인 최병주(76) 대성임업(주)대표. 희수를 바라보고 있지만 지금 200만평에 달하는 임야를 거느리고 있는 그의 얼굴은 아직껏 흡족한 미소와 푸르름으로 젊어있다.
90년초 한때 봉화, 안동, 영주 일대에 850ha(255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산림 제국'을 품에 안아도 봤다.
함경도가 고향인 최 대표는 12살때 남쪽으로 내려와 봉화에서 터를 잡고 살면서 29살 나던 지난 53년 나무와 '가시버시' 연을 맺는다.
"도회지에서는 대지나 건물을, 바닷가에서는 배를 많이 가지면 잘 살 수 있듯이 나무가 지천으로 깔린 봉화에서 살다 보니 나무를 가꾸는 것이 좋겠다 싶었지" 그와 나무는 이렇게 만나졌다.
"나무를 심으면서는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나무를 심고 가꾸어 우리 생활에 효율적으로 이용할수 있을까를 늘 생각했어. 그러다 산림을 가꾸는 일이 평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이 길을 걷게 됐지"
벌목장에서 수년 동안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당시 평당 2원씩 주고 봉화 지방의 헐벗은 야산 3만여평을 사들인 것이 오늘의 모태다. 이렇게 구입한 산에서 목재를 팔고 또 돈이 모이면 그 때마다 조금씩 산지를 넓혀 나간 것.
그는 산림 면적이 늘수록, 또 시간이 지날수록 임야 자체의 가치가 올라가고 또 나무가 자라면 소득도 올라가는 임업의 일석수조(一石數鳥)의 효과에 큰 매력을 느꼈고 자연 나무 사랑도 그 도를 더해 갔다.
조·육림 사업 초창기 최 대표의 나무 공들이기는 눈물 겨울 정도.
"나무를 심어 놓았지만 큰 가뭄이 들었어. 나무가 한 그루 두 그루씩 죽어가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야. 나무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에 날마다 잠도 안자고 물지게로 물을 퍼다 날랐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 나무들이 생기를 띠기 시작하는데 정말 만감이 교차하더군"
나무를 가꾸기 위해 풀베기라도 하면 행여 어린 나무가 다치지 않을까 그 넓은 임야를 예취기를 마다하고 낫들고 작업에 나서는가 하면, 나무가 병들면 식음을 전폐하고 원인을 분석, 처방에 골몰하는 한편 병해충 방제 등에 매달렸다.
그는 취재 하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나무를 곧잘 자식에 비유했다.
"숲도 어린애 마냥 보살핌 속에 자라지. 심기만 하면 그냥 자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 거름주고 솎아주고 병해충으로부터 지켜 줘야 더 푸르고 건강하게 자라는 게지"
최 대표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에서 더 나아가 산림자원을 우리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하자는 차원에서 60년대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영주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제재소 운영은 그가 지금껏 산림 부산물쪽이 아닌 주산물인 나무를 수입원으로 하는 전통임업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로도 꼽힌다. 이어 70년대에는 현재의 영주시 하망동에 제재소를 더욱 현대화해 주식회사 대성임업을 설립, 이 곳에서 얻어지는 수익금으로 추가로 임야를 사들여 나무를 심고 가꾸는데 재투자했다.
산림에 대한 그의 기업가적 공로는 78년 정부로부터 법인독림가로 선정되는 영예로 이어진다. 임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고취시켜 준 이 '사건'은 그로 하여금 조·육림 의욕을 더욱 북돋워 주는 계기로 작용했음은 물론일 터.
80년대 중반까지 봉화군 서벽·명호·재산, 안동시 예안 등지의 자신의 산 540여 ha에 1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게 되고 이같은 공로로 86년 동탑 산업훈장을 수상하는 영광이 잇따른다. 더더욱 채찍질. 90년대 초반엔 850ha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광활한 산을 갖는 최전성기를 구가하기까지.
그러다 80년대 말 수입 자유화 조치 속에 외국 원목이 대거 유입되면서 국내 목재가격이 하락하자 일부 산을 정리, 지금은 200만평의 임야를 관리하고 있는 것.
최 대표는 보유하고 있는 임야와 산림의 재산가치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산림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공익적 기능을 감안하면 쉬 돈으로 환산키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산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6남매와 조카, 생질 등 20여명과 직원들이 생활하고도 아직 많은 산에 울창한 숲이 남아있으니 남아도 크게 남는 장사를 한 셈이지" 하며 담담하게 웃을 뿐.
50여년을 청산에 바친 산림 인생. 일말의 회한도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무와 더불어 살아왔지만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 개인의 이익도 이익이지만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공익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정말 가치있는 일을 해왔구나'며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자꾸만 되뇌이게 돼"
-봉화·金振萬기자
---나무가 사라진다면
산림을 가꾸지 않으면 그 최후는 어떻게 될까.
'라파누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돼 비디오로도 출시된 이스터 섬(Easter Island)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그 예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젊은이들이 마지막 남은 나무를 도끼로 자르고 석상을 움직인 후에 해안에 떠 다니는 빙산을 타고 이스터 섬을 떠나는 장면에서 마지막 나무를 자르는 것이 망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시사한다.
그렇다면 실제 이스터 섬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남미의 서부해안에서 무려 3천700km나 떨어진 곳에 120㎢의 넓이를 가진 이스터 섬은 5세기경 폴리네시아로부터 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문명이 시작됐다. 인구에 비해 야자나무 숲이 상대적으로 넓었던 초기엔 토지도 비옥하고 해산물도 풍부해 삶이 풍요로웠다. 인구도 1만5천명까지 늘었고 문명도 다른 곳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풍요로운 나머지 제례(祭禮)를 발전시켰고 이것이 씨족간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기념비를 제작하는데 한정된 섬 지역에서 많은 자원을 소모한다. 기념비는 다름아닌 이 지역에 지금껏 남아 있는 600기에 달하는 무게 85t, 높이 6m의 '모아이'석상. 수레가 없던 당시 이 거대한 석상을 굴리기 위해서는 나무를 바닥에 깔 수밖에 없었고 엄청난 양의 통나무가 소요돼 약 800년 쯤에는 이 섬에서 숲은 완전히 파괴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이 섬은 기이하게 변해간다. 토양 유실이 촉진되고 그 결과 작물생산이 감소되기 시작했고 결국 기아가 발생하는 등 사회가 극도로 불안해 진다.
이에 따라 1722년 네덜란드인 로헤번 선장이 이 섬을 방문했을 때는 3천명으로 줄어든 원주민 씨족간의 날마다 전쟁을 벌여 상대편의 포로를 잡아 먹는 식인(食人)으로써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기반인 산림을 무분별하게 파괴한 참혹한 결과인 것이다.
산림파괴에 따른 응보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에서도 있었다. 5천년전 나일강 상류는 울창한 숲이 있었지만 인구 증가로 갈대대신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축조용 돌 운반에 엄청난 양의 목재를 소모하는가 하면 로마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전함을 만들기 위한 대규모 벌채 등으로 나일강 물이 점점 적어지고 소금기가 강해지면서 지금의 황무지로 변한 것. 중국의 고비사막도 과거엔 푸른 초지 지역이었지만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한 흉노족 퇴치를 위해 200년간 산림을 지속적으로 불태워 사막으로 바뀌게 된다.-裵洪珞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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