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리뷰:문학의 효용
인간은 독특한 사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의 사유 능력이란 이성과 상상력을 가리킨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구상에서 문명을 세우고 문화를 이룩한 것은 모두 인간의 이러한 사유 능력 때문이다. 이성이란 어떤 상념이 다른 상념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관계를 고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고, 상상력이란 독자적인 빛으로 상념을 채색하고 그것에 작용하여 다른 상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이성은 분석의 원리에 따른 수학적·논리적 능력이고, 상상력은 이와 같은 수량의 가치를 지각하는 것이다. 이성은 사물의 상이점을 찾아내지만, 상상력은 사물의 유사점을 중시한다. 따라서 인간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성과 상상력의 역동적인 상호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 인류는 특히 서구의 경우 계몽주의적 근대화 이후 이성에 토대를 둔 합리주의 사상과 논리에 따라 학문의 진보, 과학의 발전, 물질적 번영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역사와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지성은 지나치게 이성과 합리주의에 의존하게 되어 이성은 더욱 도구적이 되었다. 다시 말해 이성과 상상력은 분리되기 시작하였으며, 도구적 이성은 인간의 문명과 사회를 과학적 효율주의, 경제적 팽창주의, 권력의 경쟁 체제로 이끌게 되었다는 뜻이다.
근대 신화에 따른 이러한 체제는 과대한 개발을 유발하여 자연과 인간의 균형 관계를 깨뜨렸으며, 국가간의 경쟁을 불러와 결국은 패권주의와 전쟁까지도 일으켰다. 이러한 모든 인간의 문명과 사회의 파행적 발전은 도구적 이성에 토대를 둔 지나친 합리주의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인간의 또 다른 자유 능력인 상상력이 결여된 데에서 온 결과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사유들인 상상력을 회복시켜 이성과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상상력의 요체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요,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에서의 타자(他者)란 나라는 동일자에 대한 대립 개념이다. 상상력은 동일자와 타자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이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타인을 저들이 아닌 우리들 중의 한사람으로 만든다. 인간이 구축해 낸 대부분의 사상이나 종교들도 그 바탕을 타자에 대한 사랑에 둔다. 유교는 인애(仁愛)를, 불교는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기독교는 긍휼을 통한 사랑을 가르친다. 상상력은 이질적인 것을 화해시키는 위대한 사랑이고, 단편적인 것을 화합시키는 놀라운 힘이다. 결국 상상력이란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화해와 통합으로 이끌어 주는 사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 상상력을 활성화시켜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적용하여야 한다. 사회적 상상력은 도구적 이성을 보완하여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다양한 억압, 착취, 차별 등의 불평등을 해체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역할과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상상력이란 또한 우리의 마음을 최대한 폭넓게 심화·확장시켜 대상에 작용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을 타인의 의식에 접속시켜 그의 입장이나 처지를 일단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이와 같은 상상력을 통한 의식의 상호침투와 교류는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 정립에 기본적인 윤리가 된다. 사회 구성체들 사이에 공감적 관계망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는 의식의 틈새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여기서 틈새 만들기란 마음 비우기를 말한다. 즉 탐욕이나 이기주의로 가득 찬 마음속에 어떤 무엇이 비집고 들어 올 수 있도록 마음의 공영역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상력은 어떻게 교육되고 확장될 수 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문학은 분석적이기보다 종합적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있음직한 현실을 구성해 냄으로써 현실을 반영하고 재현하고 창조하고 비판까지도 할 수 있다. 현실 사회의 문제를 편파적이고 단편적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드러내 주고 인식시키는 것이 문학의 고유한 기능과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결국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문학의 세계를 통해 현 세계의 문명과 삶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한다. 문학은 작품을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계발하고 확장시킴으로써 그 사회적 소임에 참여한다. 문학은 도덕이나 철학이나 과학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를 변혁시킬 이데올로기 체계도 아니다. 문학은 또한 즐거움을 위한 오락의 대상만도 아니다. 그러나 문학을 통해 우리는 강렬한 쾌락은 아니라도, 나와 주위와의 동일화와 연민을 통해 조화를 인식하고 변화되는 즐거움은 얻을 수 있다. 문학은 상상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현실과 사회에 개입한다. 만일 문학이 현실 사회를 반영하고 그 이념을 생산하는 일에만 너무 집착한다면, 문학은 현실 속에 함몰되어 문학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문학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문학 고유의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문학 작품을 다양하게 접함으로써 우리의 감수성을 훈련시킬 수 있고 현상을 종합적으로 감식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문학은 분석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종합적인 전망적 상상력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숨쉬는 공간이 고도의 지식·정보 및 전자 영상 매체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이유이다. 문학은 비인간화, 단편화, 물신화, 효율화, 속도화로 특징지어지는 산업화와 정보화 사이에서 인간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쇄신의 전략이 되어야 한다.---44차 문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화'에 대해 재검토해 보자.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해서 무심하거나 소홀해서는 안되며, 항상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화는 다양한 방법과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다음 제시문에서는 특히 '장난감'을 통한 놀이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화를 문제 삼고 있다. 이 제시문을 읽고 '사회화와 개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글에 나타난 필자의 견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논술하시오.
시중에서 유통되는 장난감들은 본질적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축소한 하나의 작은 우주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대상들을 축소한 복제품들이다. 대중은 어린아이를 난쟁이와 같은 보다 작은 인간으로 간주하며 그렇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그의 크기에 맞는 대상들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장난감들을 보면 창조된 형태라곤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간단한 손기술에 근거하는 블록 쌓기 놀이만이 단지 역동적인 형태를 제시할 뿐이다. 나머지는 항상 어떤 대단한 것을 의미화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대단한 것이란 항상 어른들의 현대적 삶의 신화들이나 기술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완전히 사회화된 것이다. 예를 들어 군대, 라디오 방송국, 우체국, 병원(축소된 의료 기구 가방과 인형들을 위한 수술실), 학교, 교통(기차, 자동차, 해군 초계정, 스쿠터, 주유소), 과학(화성인) 이 모든 것이 장난감이 된다.
결국 장난감은 어른들의 기능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보이는 대로 똑같이 미리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아이들은 어른들의 기능들을 미리 준비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심지어 사고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는데도, 군대라든가 우체부라든가 스쿠터라든가 하는 것들을 만들어 낸 자연의 알리바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들에게 제공된 모든 장난감들을 보면 어른들은 별로 놀라지 않을 만큼 친숙한 것들이다. 어른들은 장난감들 속에서 전쟁이라든가 관료주의라든가 추함이라든가 화성인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포기의 기호'아이가 어른들의 신화적인 세계가 조작해 놓은 알리바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실제 현실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모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방이 너무 완벽하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오줌을 누는 인형을 보자. 그것은 식도를 가지고 있으며, 젖병을 물고 있고, 기저귀를 적신다. 틀림없이 이제 곧 우유는 위장에서 오줌으로 바뀔 것이다. 이 장난감은 어린 여자아이가 가사 생활의 인과성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대비시킬 것이다. 이로써 그 아이는 앞으로 다가올 엄마 역할에 '맞게 적응될'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를 충실하게 따르는 이 복잡한 대상들 앞에서 아이는 소유자나 사용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아이는 결코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아이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용할 뿐이다. 아이는 모험이 없는 몸짓들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아이는 빈둥거리는 작은 소유자가 된다. 이제 집안에서 빈둥거리는 아이는 심지어 어른들이 은밀하게 사용하는 인과적인 방법들을 만들어 내지 않아도 된다. 인과적인 방법들은 이미 만들어진 채로 아이에게 주어질 뿐이다. 아이는 단지 그것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아이가 끝까지 완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블록 쌓기 놀이 중에서도 아주 일부분만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줄 뿐이다. 그것도 그 놀이가 어른들의 작업처럼 지나치게 정교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다. 이 놀이 속에서 아이는 결코 의미심장한 대상들과는 무관하다. 아이는 그 대상들이 어른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서 상관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아이는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 아이는 걸어 다니는 형태들이나 굴러다니는 형태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놀이 속에서 아이는 삶을 사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롤랑 바르트, "신화론" 중 '장난감'에서
---42차 문제 우수작
'무한질주!'동네 PC방 이름이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추세는 속도를 중시하고 있다. 그냥 해치워 버리자 식의 '빨리빨리'란 말은 우리들 사고의 제한을 가져온다. 이 것은 큰 문제임을 상기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속도 경쟁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자.
(가)에서 알 수 있듯이 속도 경쟁은 망각의 한 요인이다. 현재를 잊으려고 빨리하는 걸음은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주위를 둘러보는 시간도 줄어들게 된다. 이로 인해, 물신주의를 초래하고 때로는 그것이 타인에게 심각한 상황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지난 번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누출 사고 때에 이를 은폐하려 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데서 발생한 것이다. (가) 제시문에서는 정신적 속도와 망각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반면에 (나) 제시문은 신체적 속도와 인간 능력 불신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감정이 고조된 채 자기 자신을 잊는 엑스터시 상태로 기계의 속도에 맞춰 가는 우리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술 지배가 인간의 존엄성을 약화시킨다. 마냥 뒤처져 따라가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무조건 최고의 속도를 내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느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능력의 실현도 중시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현 시점에서 (다) 제시문에 동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제까지 인기를 얻고 있던 가수가 내일이면 잊혀지는 현실, 지하철 붕괴 사고가 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또 다른 건물이 붕괴되는 현실들이 시간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무조건 빠른 것에 대한 맹신으로 소중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잃고 있는가를 자각해야 한다.
물신주의가 팽배해 무한정의 속도 경쟁을 가져옴과 동시에 망각이라는 부산물도 따라왔다. 우리는 자신에게 맞는 각각의 속도가 있다. 남이 빠르다고 해서 그 만큼의 에너지가 없는 사람이 따라잡기 위해 달릴 때 중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음을 체험해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인 물신주의를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물신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해서 속도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속도가 영(零)이라는 것은 정체(停滯)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서 물질만을,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보는 자세를 지양하며 항상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줄 알아야 한다. 여유를 가지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현대 문명 사회는 반성할 줄을 잊어버렸는지 마냥 전진만 하려고 한다. 현대 문명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다면 잠시 속도를 늦추고 기술에 대한 맹신을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속도를 낼 줄 아는 융통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자질을 키우고 현대 문명 사회의 지나친 속도 경쟁을 경계하며 겉만 성장하지 말고 질적 성장을 먼저 이루어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자.-강영진 경명여고 3년
---42차 문제 총평
42차 문제도 40차 문제에 이어서 논술고사에 대한 적응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의도로 2000학년도 부산대학교 논술문제를 편집 정리하여 출제하였다. 특히 이 문제는 세 개의 제시문을 주고 그것들의 공통 논지가 결론이 되도록 논술문을 구성하라고 요구하는 특이한 문제였다. 42차처럼 특이한 형식의 문제는 예상되는 다양한 문제 형식을 접해본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다. 따라서 글의 시작은 결론의 구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결론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제시문을 분석하는 일이 당연히 선행되어야 한다. 제시문의 세 글은 물신주의에 따른 속도 경쟁이 우리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아 가는지를 이야기하며, 속도 경쟁이 아닌 여유로운 삶의 자세가 삶의 진정한 방향을 찾기 위한 전제가 됨을 말하고 있다. 글 ㈎는 '느림과 기억', '빠름과 망각'의 관계를 상관적으로 대비시켜 '느림'과 '빠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글의 전개 방향을 암시 받아야 한다. ㈏는 기술 혁명에 의한 속도가 인간들로부터 '느림의 즐거움'을 빼앗아 갔음을 밝히고 있다. ㈐는 진정한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여유로운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밝힌다. 이로부터 구성할 논술문의 결론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이 결론과 어울릴 수 있는 서론과 본론 작성이다.
42차 문제의 우수작으로는 경명여고 3학년 강영진 양의 글을 선정하였다. 강양은 우선 문체가 논술문에 어울린다. 단, 여기서보다 더 감정적 표현에 치우칠 경우는 상대적으로 논리적 설득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구성의 측면에서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본론의 분량 배분이 단락 간에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논지 전개의 단계성을 살리지 못했다. 서론에서 화제 도입이 잘 되었다. 학생의 주변에서 접하는 사례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화제 도입을 위한 소재로 이용한 점이 돋보인다. 본론 첫째 단락은 잘 되었다. 제시문의 논지를 충실히 파악하여 결론으로 논지를 몰아갈 준비를 잘 갖춘 것이다. 그런데, 본론 둘째 단락에서 단계성을 살려 발전된 논지를 전개했어야 하는데 그에 이르지 못하여 아쉽다. 본론 둘째 단락은 첫 단락의 내용을 발전시키는 과정 없이 결론에 상당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본론 둘째 단락의 마지막 문장 "여유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전체의 주제문이 될만하다. 본론 둘째 단락의 이러한 구성은 결론 단락을 약화시키는 결과 초래로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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