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길 나의 삶-조현자 무료급식소 운영

올해로 43살. 그러나 조현자(여)씨를 만나면 그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스무살의 열정과 활달함이 배어있다. 색깔로 치면 파란색이라고 할까.

"하루 하루 정신 없이 살다보니 내 모습이 어떤지 저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행복해요".

처음 보는 이들에겐 그녀의 모습은 낯설다.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수의 삶을 상식이라 여기면 그녀는 한참을 벗어나 있다. 아직 독신인 조씨. 그러나 200여명을 책임지고 있다.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와 노숙자를 위한 쉼터, 그리고 해체가정을 위한 공동체의식구들이다.

"모두 꾸려나가려면 한달에 1천500만원은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경기가 좋지 않아 부채도 몇억 지게 됐습니다" 96년 무료 급식소 문을 연 이후로 흔한 보조금 한푼 없이 남을 위한 일이라면 무조건 시작부터 한 탓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운명'이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리곤 '죽음 대신 얻은 삶'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94년 1월 지독히 추운 날이었죠. 대구 팔달교를 넘어오다 음주 운전차와 충돌해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병원에서 깨어난 그녀는 목 경추뼈 골절로 하반신 마비라는 판정을 받았다.

"앞이 캄캄한 것이 도저히 살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그녀는 "환자복 주머니에 쥐약을 넣고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번 오갔다"고 털어놨다. 세상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보이는 날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날. "문뜩 죽기전에 내가 할일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다음날 목에 깁스를 하고 휠체어를 탄채 땅을 보러다녔다고 했다.

양로원 만드는 것이 꿈이였던 조씨에게 "죽기전 노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라도 차려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 사고가 나기전까지 조씨는 7개의 대형 의류 매장을 가진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17살에 서울로 올라가 야간고등학교를 마치고 혼자 이룬 결실이었다.

조씨는 "아버지가 두집 살림을 한 탓에 상처를 많이 받고 컸다"며 어릴적 이야기를 꺼냈다. "심지어 공부를 잘하는 것까지 어린 마음에 짐이 될 정도였다"며 "할머니를 무척 좋아했는데 두집 눈치를 보며 이리저리 옮겨다니던 모습이 아직도 가장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때 상처가 오히려 '자신의 삶의 밑거름이 됐다'고 했다.

"철 없을 시절이지만 할머니를 보면서 양로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역경을 극복하는 인내심으로 이어질수 있었다"는 것.

"서울에서 참기름 장사며 도넛을 만들어 팔때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저절로 지갑에 손이 들어갔다"는 조씨는 "20살 되자 겁없이 야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27살에 전재산을 사기당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온 뒤 의류업을 하며 잠시나마 어릴적 꿈을 접고 살았다.

"아마 그날 교통 사고가 나를 다시 깨운 동기가 된 것 같다"는 조씨는 땅을 보러다니며 급식소 사업을 매달리다보니 기적같이 하반신 마비가 풀렸다고 했다.

하지만 봉사에도 여자라는 딱지가 벽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동구 혜안동에 '수녕의 집'이란 무료 급식소 문을 열던 96년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리던 해. '모 출마자와 관계가 있는 여자'라는 등 그녀를 둘러싼 온갖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워낙 씩씩하게 살다보니 웬만한 어려움에도 잘 울지 않았는데 너무 속이 상해서 밤에 많이 울었죠".

조씨는 그래도 하루 10여차례씩 봉고에 노인들을 실어나르며 꿋꿋하게 급식소를 운영했단다.

IMF가 터진 98년. 그녀는 달서구 두류동 레스토랑 건물을 빌려 노숙자 쉼터를 시작했다. "나도 부도위기에 몰려 있었는데 길거리로 내몰린 가장들을 보니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일을 벌이게 됐다"는 조씨.

현재도 노숙자 쉼터에는 갈곳없는 50여명이 넘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작년 12월엔 서구 달성고등학교 옆 3층짜리 건물을 구입해 '나누우리'란 공동체 마을을 만들었다. 1층엔 할인매장이 2·3층엔 6채의 연립 주택이 있다.

"노숙자들이 사회로 돌아갈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다시 가족을 만들어줘야 겠다"는 생각이 앞서 은행빚을 내가며 주택을 구입한 것이다.

아직도 그녀는 노숙자를 이용하는 사기꾼이나 배후가 이상한 여자라는 '의심의 눈총'을 간혹 받는다. "반지를 끼거나 비싸 보이는 옷만 입어도 수근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조씨는 "처음에는 상처가 됐지만 이제는 신경도 안쓴다"며 웃었다. 모두가 생각이 다른데 나를 알아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진실은 언제가 빛을 발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급식소와 노숙자 쉼터 운영을 위해 의류업 등 자기 사업을 계속해야 하는 탓에 조씨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 하지만 남은 꿈인 양로원을 차릴 때까지 아직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그녀의 집념 앞엔 5월의 햇살이 더욱 따사롭게 다가선다. -李宰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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