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북구 침산동 한 아파트의 어두운 방 안. 새벽 5시. 올해 일흔의 노인이 며느리의 손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물인간 상태인 며느리 최매희(44)씨는 눈만 힘없이 뜨고 있을 뿐이다. 지난 92년 5월1일 이후 9년째다.
시아버지 이용진(70)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알건 모르건 이른 새벽 맏며느리 최씨를 안마해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어 고여 있는 가래를 뽑아주고 플라스틱관으로 연결된 소변기를 비운다. 다시 얼굴을 닦아주고 코에 달린 관에 주사기로 음식물을 넣어주고….
넉넉하진 않았지만 평화롭던 이 할아버지의 집에 불운이 닥친 것은 지난 92년. 며느리 최씨가 머리가 아프다며 동네약국에 약을 사러 갔다가 교통사고로 쓰러졌다. 뺑소니였다. 9년 며느리 병 수발의 시작이었다.
"어쩌겠나. 우리집이 좋아 지가 시집와 손자, 손녀 다 낳고 우리집 식구가 됐는데. 옛말에도 출가외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불행은 혼자 오지 않았다. 병원 생활이 1년이 지났을 때였다. 노모에게 심각한 치매증이 찾아왔다. 부인 박화선(69)씨가 대소변을 못가리는 노모를 집에서 돌봤다. 이 할아버지는 병원과 집을 오가며 온 정성을 다해 노모와 며느리 병간호를 했다.
"그때는 정말 말이 아니었어. 온 집안에 냄새가 코를 찔렀지" 노모는 96년 여름, 85세로 세상을 달리했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며 며느리 최씨의 퇴원을 권유했다. 그 후 이 할아버지는 며느리와 한 방에서 자며 간호했다.
"우리 집 사람 고생이 더 크지. 남편도 며느리한테 뺏기고 혼자 자야 하니, 허허"하지만 모진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며느리를 함께 돌보던 맏아들(47)이 지난해 이맘때부터 갑자기 다리를 못쓰게 됐다. 목발을 짚고 겨우 다닐 정도. 노모, 며느리에 이어 아들까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 할아버지의 정성 덕인지 며느리 최씨는 때로 시부모, 남편, 아들(20), 딸(18)의 얼굴 정도는 알아보고 눈을 깜박거리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 시간은 의식이 없다.
최근에는 며느리의 변비가 심해져 걱정이다. 직접 손으로 처리해준다. 1주일에 한 번이지만 세시간 동안 옆에서 같이 힘을 쓰고 나면 주저앉고 싶어진다.
"안락사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길래 솔직히 안락사도 생각해봤지. 저한테도 살고 싶냐, 죽고 싶냐 물어보니 죽고 싶다며 눈을 깜박거리데. 하지만 저렇게 눈이 아직 반짝반짝하는데 어떻게 그 짓을 해"
평소 특별히 애틋하게 대하진 않았지만 그냥 '잡수고 싶은신 것은 없으시냐'며 담배나 1, 2갑씩 주머니에 넣어주던 며느리, 그에 대한 이 시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3년전만 해도 기적이 일어나 어느날 아가가 갑자기 일어날 것 같았어. 하지만 이젠 기대 안해. 그냥 지가 먼저 죽을까, 내가 먼저 죽을까, 그 걱정뿐이지 뭐"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며느리 최씨도 이 할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었는 지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것 같았다.
李尙憲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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