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본서 꽃핀 우리 도자기문화-2)일본 도자기 발상지 아리타

일본 도자기가 시작되는 곳 아리타. 산죽과 벚꽃들이 번갈아 펼치는 봄의 향연을 즐기며 후쿠오카를 출발한 지 두시간여를 지나자 열차는 갑자기 산악지대로 들어선다. 터널을 지나고 좁은 계곡 사이를 비켜돌자 풍경은 지금까지 본 비옥한 대지와는 사뭇 다르다. 옹색한 강원도 한 산골처럼 산기슭에는 여남은 채의 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다. 마을 곳곳 쭈뼛 쭈뼛 삐져 나온 붉은 벽돌 굴뚝들이 도자기 마을이 가까워졌음을 알린다.

한적한 산골, 엉뚱스럽게도 수출 컨테이너가 늘어 선 플랫폼을 뒤로 하고 역사(驛舍)로 들어서자 2m나 됨직한 큼직한 도자기가 대합실 분위기를 압도한다.

첩첩산골 아리타. 줄줄이 늘어선 도자기 가게. 그러나 400년 시공을 훌쩍 뛰어 넘으면 이름없는 조선 도공들이 부르는 망향의 탄식들이 곳곳에 배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아리타는 자기(磁器)와 인연 없는 평범한 산골이었다. 그릇이래야 낮은 온도에서 구운 질 낮은 도기(陶器) 정도가 생산될 따름이었다. 도기는 자기와 달리 토기보다 다소 발전된 기물로 일본 어디서나 생산되는 그런 그릇이었다.

그러나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으로 인해 아리타의 역사는 다시 쓰여지게 된다."도공 이삼평 일행은 조선에 출병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를 따라 건너온다. 다쿠성 아래 살면서 이삼평 일행은 주변의 흙으로 그릇을 구웠으나 자기는 구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이삼평은 사가(佐賀)번내 통행권을 가지고 백토를 찾아나서 1616년 아리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토광(白土鑛)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가미시라가와(上白川) 덴구다니(天狗谷)에다 가마를 짓고 자기를 굽기 시작하여 백자의 마을로 터를 닦아 번성을 거듭하게 됐다"

'히젠(肥前)도자사고'에 적힌 개략적 내용이다.

이삼평은 자신의 발로 왜장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왔을까. 앞의 내용은 1970년대 용천사란 절에서 발견된 소송문서 기록을 근거로 했다. 문서는 이삼평 사후 100여년 뒤 이즈미야마 광산의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을 때 작성됐는데, 그때 후손들이 소송에서 유리하도록 작성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어쨌든 아리타에서는 백자가 생산되자 다음해부터 사가번의 세수입이 35배로 급증하게 된다.

이때 나베시마는 조선 도공 7명에게 성(姓)을 하사하는데 이삼평에게는 '가네가에'라는 성(姓)과 함께 '삼석영대(三石永代-자손 대대로 삼석의 녹봉을 지급함)'란 문서를 내린다. 당시 성은 무사계급만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비춰본다면 엄청난 특권이었다.

아리타에서 백자가 생산되자 조그만 산골은 격랑에 휩싸인다. 17세기초 일본사회는 병농(兵農)분리 정책으로 칼을 녹여 호미를 만들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급속히 안정을 회복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무사계급이 서서히 몰락하게 되고 곤궁에 지친 무사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도자기가 생산되는 아리타로 몰려든다.자연 아리타는 도자기의 질이 떨어지면서 가마 땔나무 부족과 기술의 번외 유출이란 문제에 부딪힌다. 조그만 산골에 2천여명의 도공들이 들끓자 1637년 사가번은 조잡한 도자기를 만드는 일본인 852명을 아리타에서 추방시킨다. 대신 기술이 우수한 조선 도공들만 모으게 되는데 이 때 백파선(白婆仙)이란 여걸이 등장한다. "백파선은 심해(深海)사람 종전(宗傳)의 아내인데 종전은 승려로서 임란 때 일가 36명을 데리고 다케오(武雄)영주를 따라 건너왔다"고 일본 기록은 전한다. 종전은 다케오의 내전(內田)이란 곳에서 도자기를 굽다가 남편이 죽자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아리타로 와서 이삼평과 함께 조선 도공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이 때부터 사가번은 가마를 관요(官窯)와 민요(民窯)로 분리시켜 도자기의 질적 저하를 막는 정책을 편다. 관요의 조선 도공들은 이즈미야마가 있는 광산 골짜기로 집단이주 시키는 한편 마을 입구에 초소를 세워 감시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에 이른다. (야마모토 징에몬 일지)

조선 도공들은 무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골짜기 마을에서 유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마을 밖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고 행동의 제약을 받을수록 두고 온 고향산하가 더욱 절절하게 그리웠으리라….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는 팔월 한가위 날이면 잡혀온 도공들은 조선땅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관음산에 올라 고향쪽을 바라보며 제사를 올리고 술을 마시고 춤추며 망향의 슬픔을 삭이며 하루를 보냈다고 전한다.

당시 이국땅 포로의 몸이 된 조선 도공들에게 삶의 목표가 있다면 오직 하나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 다이묘에 헌상하고 인정받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가번의 다이묘 나베시마는 좋은 도자기를 얻기 위해 조선 도공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때문에 아리타 도자기는 짧은 시간에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덴구다니 가마 초기, 조선에서 막 건너온 양식이나 문양들, 즉 청화백자 모란문이나 당초문과 굽낮은 접시 종류들이 구워졌다. 그러나 50년이 채 못되어 조선 양식은 사라져 버리고 일본 취향의 그릇들로 급속히 변모해 버린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조선 도공들은 그만큼 빨리 일본속으로 동화되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아리타에서 조선 색채를 찾을 수 없듯이, 섬나라 부드러운 산하처럼 화려한 채색의 일본 도자기로….

이삼평이 덴구다니에 가마불을 지피고 30년이 가까워지던 1644년, 아리타는 대행운을 맞는다.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한 해 20만개나 되는 도자기를 유럽과 세계 각지로 수출하던 경덕진이 폐허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동양 열풍이 불기 시작하여 왕족들 사이에서 도자기 수집 열기가 달아오르던 시기였다. 독일 작센지방의 아우구스트왕은 자신의 군사 600여명을 베를린왕이 가진 중국 도자기 127점과 맞바꿀 정도였다.

유럽으로 도자기를 실어나르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황금알을 낳던 중국 도자기의 수입이 막혀버리자 대안책으로 아리타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유럽 수출로 탄력이 붙은 아리타 도자기는 보다 과감하고 다양한 기법들을 개발해나간다. 발전을 거듭한 아리타자기는 이후 주요 수출항인 근처 이마리(伊万里)항의 이름을 따서 '이마리 자기'로 불리며 1730년까지 70여년간 동인도회사를 통해 700만개의 도자기를 동남아시아, 인도, 남아프리카, 유럽 등지로 실어 보내게 된다.

도자기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아리타의 사가번은 막부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고, 그 명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지금까지 가키에몬양식의 커피잔 세트가 몇 백만원에 불티나게 팔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400년전 조선 도공의 한(恨)과 명예가 서린 곳. 포로의 몸으로 끌려와 망향의 아픔을 딛고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를 이루어내고 일본 경제력의 기초를 다지게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아리타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임진왜란의 아픈 현장들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내일은 400년전의 이삼평을 만나러 가려한다.-글·사진:全忠瑨기자(cjje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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