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사랑과 화해의 사회를…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은 연못에 빠진 어린 제자를 구하고 죽는다. 제자의 참다운 성장을 위해 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스승은 연못 밖으로 제자를 밀어올린 뒤 물 속에 가라앉아 버린다.

스승의 이 죽음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왜, 무엇 때문에 스승이 죽음의 길을 선택했는가'라는 화두(話頭)를 남김으로써 제자가 그 화두와 싸우며 성장하기를 바란 데서 비롯된 숭고하고 장엄한 길에 다름 아니다.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랑의 서림'은 문화와 역사를 키우고 지키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스승의 극진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그 같은 명의가 됐을 턱이 없다. 추사 김정희의 지극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소치 허유가 섬 무지렁이에서 과연 탈바꿈할 수나 있었을까.

스승의 참사랑을 기리며

사도(師道)의 귀감이 되는 동서고금의 일화들을 한 줄로 세운다면 그 끝이 무한대에 가까울는지 모른다. 이런 일화 한 토막도 생각난다.

어느 비 내리는 날, 길에서 스승을 만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바라보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질퍽한 땅에 그대로 엎드려 큰절을 했기 때문이다. 지조있고 고결한 선비의 한 모습이지만, 스승을 공경하는 '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저명한 어느 생물학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감동적이다. 그는 너무나 잘 아는 생물 문제에 대해 자식이 물었는데도 모른다고 했다. 자식이 스승의 실력을 얕볼까봐 바로 그 자리에서 선생님께 전화로 물어서야 답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는 어떤가. 스승이 '스승직'을 자랑스러워 하던 사회는 가고, 그 권위마저도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심지어는 제자가 스승을 때리는 인륜파탄적인 지경에 이르렀다.

스승을 통해 규범가치가 전해지고, 그 가치가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어 작용할 때, 그 사회에는 공동체의식이 형성되고, 그 의식은 끈끈한 유대감과 친화의 놀라운 견인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스승의 날'이 바로 며칠 앞으로 다가와 이런 생각들을 해 보았지만 우울한 생각은 그 끝이 안 보일 지경이다. '계절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5월이건만 은총과 축복보다는 아픔과 숱한 그림자들이 강조돼 다가오기도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과 주위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달은 더구나 '가정의 달'이요 '청소년의 달'이다. '스승의 날'뿐 아니라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비롯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성년의 날' '법의 날' '노동자의 날' 등 뜻깊은 날들이 잇따라 가정과 가족, 자신과 타인, 사랑과 화해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 준다.

가정은 처음이자 마지막 가치

사도(師道)의 회복을 맨먼저 내세워 보았지만, 지양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들 가운데 '가정 일으켜 세우기'는 가장 근본적이며 시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고로 우리의 가정이 이즈음과 같이 위기에 놓인 적은 없었다. 옛날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가족과 가정이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 시련을 이겨내며, 보다 밝은 내일을 꿈꾸곤 했다. 지금과 같이 가족이 해체되고 가정이 흔들리며 인륜과 도덕이 무너진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가정은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는 출발점이자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이 건강하지 않으면 사회도, 나라도 건강할 수가 없다. 고개 숙인 아버지의 기(氣)를 살려 주고 방황하는 가족들을 감싸안는 사랑과 화해의 울타리로서의 가정, 그런 본래의 가정과 가족 되찾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더구나 국제통화기금 체제 이후 여전히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데는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는 사랑과 화해의 정신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같은 정신은 먼저 가정에서 싹이 트고 자라야만 한다. 그런 다음 마치 물이 흐르듯이 사회로 번지고, 나라로 확산되는 것이 '수순'이요 '이치'이며, 바람직한 '흐름'이기도 할 것이다.

이같은 사랑과 화해의 분위기가 성숙하고 돈독해질 때 우리 사회는 따스하고 풍요로워지며, 자연스럽게 '바로 서는 국가'까지 기약하게 해 주리라고 믿는다. '부처님 오신 날'의 환한 대낮은 마음을 부추겨 이런 생각에 자꾸만 불을 지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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