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마지막 적은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를 정복한 로마는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파괴한 후 소금을 뿌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땅으로 만들었다. 그 후 서기 96년에서 235년 사이 '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가 이루어졌다. 로마는 자기에게 굴복하는 국가에게는 지친권을 줄 만큼 관용하기도 하였지만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철저하게 응징했다.
영국도 그랬다. 1차 세계대전 전후로 팍스 브리태니카의 유니온 잭(영국 국기)을 휘두르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연방을 만들었다. 영국인의 사상, 철학, 가치관, 문화가 보편타당한 척도였다.
2차 세계대전 후, 특히 공산권의 붕괴 후부터는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가 이루어지게 됐다. 경제에 있어서 팍스 아메리카나는 어떠한 지배를 해왔는가?
미국은 무역의 자유화·세계화는 선진국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게도 큰 이득이 될 것이라며, 세계무역기구(WTO)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국가들은 무역의 완전 자유화에 큰 실망을 하고 있다. 이는 자유무역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개발도상국은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자기나라 제품을 세계시장에 내놓을 수 없는 반면, 자유주의의 이름 아래 선진국의 제품이 개발도상국의 시장을 휩쓰는 것은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WTO를 만들면서 선진국들은 자유무역-세계화에 걸림돌이 된다며 모든 국가가 관세를 크게 낮출 것을 주장하였다. 개발도상국은 관세를 낮추면 그 나라의 산업들이 황폐화 될 수 있다는 위기를 느끼면서도 관세를 대폭 낮추어 주었으나, 지나고 보니 선진국들이 자기들보다 관세를 상대적으로 덜 낮추었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지적재산권이라는 게 모두 선진국의 이권을 보호하는 명분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미국은 WTO를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었으면서도 WTO가 미국 국익에 방해가 되면 WTO의 자유무역주의에 상반되는 미국 국내법 수퍼301조를 꺼내들어 상대국을 제재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세계화를 선진국들의 자기네 잇속을 보호하기 위한 '위장된 보호주의'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9월 미국의 시애틀에서 열린 WTO총회에서의 시위, 그 후 스위스 다보스의 세계경제회의에서의 시위, 방콕의 유엔 무역 및 개발기구(UNCTAD)회의에서의 시위 등은 바로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시민단체들의 목소리들이었다. 지난 1996년 미국행정부는 증권관계법을 고쳐 헤지펀드 설립을 아주 쉽게 만들어 미국의 거대 자본이 세계를 대상으로 이익을 챙길 수 있게 하였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계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한국정부가 우리경제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상품시장과 자본시장을 완전 개방하여 무역적자 236억달러, 외채가 2000억달러 가까이 달하도록 한 것이었다. 좋게 말한다면 한국경제를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에 적응시키도록 하는 과정에서 치른 홍역이고, 거칠게 표현한다면 선진국들의 투기성자금이 한국의 경제를 황폐화시켜도 팍스 아메리카나의 자본거래 세계화 방침을 거스를 수 없어 이를 고스란히 당했던 것이다. 반면에 외환거래정지, 고정환율제시행 등으로 이에 도전한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나라는 구했어도 국제적인 이단아로 매도를 당하였다.
무역자유화의 큰 수혜자 중 하나는 한국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화주의에 너무 충실해 우리의 문을 닫을 수 있는 빗장을 모두 버리고 문을 열었다. 일본의 도쿄 도지사라는 자가 재일 한국인을 잠재범죄인이라 지목하고 우리의 동해-남해어장을 고스란히 내주어 어민들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이제 일본정부가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공식적으로 큰 소리 내어도, 대일 소비성 사치품 수입이나마 억제치 못하고, 대일 적자가 몇 백억달러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손가락하나 못 대고 걱정만 하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미국이 한국의 시장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있다. 한국의 문을 여는데 미국이 많은 고생을 하지만, 막상 문을 열어 놓으면 가장 먼저 뛰어들어 시장개방에서 득을 보는 것은 약삭빠른 일본이라는 것을. '제2의 외환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우려하는 요즈음의 경제사정에 하 답답한 마음으로 글을 써보았다.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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