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대최다 국조·청문회…'정쟁 국회'

"대화와 타협 보다는 정쟁과 대결로 얼룩진 비생산적인 국회, 정치가 실종된 무기력한 국회…"

오는 29일로 임기가 끝나는 15대 국회에 대한 정치권과 시민단체, 일반 국민들의 대체적인 인식을 집약한 말들이다.

지난 96년 5월 30일 문을 연 15대 국회는 임기중에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을수 있지만 임기 내내 국회를 정권창출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여야의 당리당략에 따라 철저한 '투쟁의 무대'가 됐다.즉 97년 12월 대선 직전까지의 15대 국회 전반기는 대선을 겨냥한 여야의 정쟁으로 점철됐으며,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15대 국회 후반기도 정권교체에따른 후유증으로 대립과 갈등은 오히려 심화됐다.

특히 15대 국회 후반기는 집권여당이 소수정권의 한계를 안고 출범함에 따라 야당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고, 여당이 인위적 정계개편을 통해 정국안정을 모색하자 다시 야당이 이에 반발해 대여투쟁을 일삼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이같은 15대 국회의 파행은 '정권교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여당의 국정운영에 협력하지 않은 야당의 책임도 크지만, 공동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출발한 '2여'가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이러한 비생산적인 국회상은 의원들이 여야를 떠나 공천권을 쥐고 있는 정당 보스들의 눈치를 살피며 '투쟁도구'로 전락하거나 '민의의 대변자'라는 본연의 자세를 망각한 채 당리당략에 휘말려 국민을 위한 정책개발을 소홀히 함에 따라 더욱 심화됐다는 분석이다.

물론 15대 국회는 역대 어느 국회보다 많은 법안과 안건을 처리하는 등 외형상으론 활발한 입법활동을 한 것처럼 보인다.

15대 국회가 처리한 법안은 총 1천561건으로, 13대(806건), 14대(780건) 국회때보다 2배 가량 많은 법안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15대 국회가 새천년의 전환기에 자리잡은데다 IMF(국제통화기금)사태 여파로 입법수요가 역대 어느 국회 때보다도 많았기 때문이지, 국회의 생산성이 높아진데 따른 현상은 아니라는게 정치 전문가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15대 국회의 비생산성은 국회에 접수된 법안중 처리되지 못한 법안의 비율을 보면 바로 드러난다.

지난 4년동안 총 1천951건의 법안이 접수됐으나 이중 390건을 처리하지 못해 미처리 법안의 비율이 20%에 육박했다. 이같은 비율은 14대 국회의 15%, 13대 국회 14% 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이다.

15대 국회의 비능률은 또한 국회소집 횟수와 공전 기간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권교체(97년 12월) 이전에는 8차례밖에 소집되지 않았던 국회는 국민의 정부출범 이후 무려 25차례나 열렸으며, 이중 17차례는 야당이 소속의원에 대한 검찰의 체포수사를 막기 위해 단독으로 소집한 '방탄국회'였다.

또 여야의 대립으로 국회 문만 열어놓은채 공전된 경우도 5차례에 걸쳐 121일에달한 점도 15대 국회의 어두운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여야는 4·13 총선후 민생현안 처리라는 명분을 내걸고 15대 국회 마지막 임시국회를 소집하려다 당리당략과 의원들의 외유 등으로 인해 결국 문을 열지 못하는 등 막판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아울러 15대 국회는 여야간의 첨예한 대치를 반증하듯 국정조사와 청문회도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96년 4·11 총선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96년 총선 공정성 시비에 관한 국정조사를필두로, 97년 3-5월 한보사건 국정조사, 99년 1-2월 IMF 환란 원인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99년 8-9월의 '옷로비 의혹사건 청문회'와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 국정조사 등 5건의 청문회가 열렸다.

특히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 각각 빚어진 한보사건과 옷로비 의혹사건을 다룬 청문회는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속에 정부의 지지기반 약화로 이어졌다.

한보청문회의 여파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를 비롯, 홍인길(洪仁吉) 전 청와대 총무수석 등 문민정부 실세들이 구속되고 집권기반이 급속히 약화됐으며, 이는 결국 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마찬가지로 '옷로비 사건'은 IMF 경제위기를 효과적으로 수습한 국민의 정부의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만 '옷로비 사건'은 국회가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를 도입하게 함으로써 국회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기도 했다.

아울러 15대 국회는 역대 어느 국회보다 당적을 바꾼 의원들이 많아 '철새정치인'을 양상한 국회로 기록될 전망이다.

신당창당과 당명변경으로 소속이 바뀐 민주당과 한나라당 소속 의원을 제외하더라도 15대 국회 들어 한차례 이상 당적을 바꾼 의원들은 모두 85명에 달한다.

또 15대 국회는 회기중 당선무효, 사망 등의 사유로 22곳의 지역구에서 재·보선이 치러져 역대 국회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밖에 한보사건으로 홍인길, 황병태(黃秉泰), 권노갑(權魯甲) 의원이 구속되는등 각종 비리에 연루돼 의원직을 상실한 의원도 적지 않으며, 제정구(諸廷坵), 김복동(金復東) 전 의원 등 8명이 의원직을 마치지 못한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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