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박태준 총리가 사퇴를 결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측근들의 말을 종합하면 박 총리는 자신의 부동산 명의신탁 파문이 시작된 지 하루도 안돼 거취문제를 결론내린 것으로 보인다. 18일 오전 공관에서 가진 측근들과의 긴급대책 모임에서도 강하게 역정을 내기는 했지만 이미 사퇴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면담 건의도 "괜한 변명의 자리가 될 것"이라며 거부했다는 전언이다.
박 총리가 거취결정을 서두른 데는 자신의 부동산 구입자금의 출처가 속속 밝혀지는데다 공직기간을 세워야 하는 최고 책임자의 도덕성 문제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의혹에다 구입자금이 뇌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도저히 영을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다소간 파문의 축소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엎어진 물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사퇴 표명 하루전인 이날 박 총리는 곳곳에서 착잡한 심경을 피력했다. 철강왕 스스로 자신의 불명예 퇴진을 의식한 것이다. 이날 아침 한 측근과의 독대에서는 주변관리의 미숙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 이날 오후에는 자신의 총리취임 초기부터 꼭 방문하려 했던 서울 테헤란로의 벤처밸리를 찾았다. 오후 일정이 전혀 없었던 박 총리가 벤처기업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부터 거취표명을 앞둔 신변정리로 비쳤다. 이 자리에서도 박 총리는 보기드물게 신세한탄의 말들을 쏟아냈다. 벤처사장 10여명과 환담을 하는 자리에서 박 총리는 "이제 노쇠했어…"라든가 "포항과 광양을 뛰며 4반세기를 보냈는데 머리도 다 빠지고, 그런거 생각하면 억울하다"는 등의 말을 했다.
이어 공관으로 직행한 박 총리는 조영장 비서실장 등 비서진과 최종 회의를 갖고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박 총리는 "평생 목숨보다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해온 제가 10여년전의 부주의한 일로 이런 치욕스런 처지를 당해 참담한 심경을 가눌 수 없다"며 "어떤 변명도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박정호 공보수석 비서관도 사퇴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판단에 맡긴다"고 했다.
이후 박 총리는 이날 밤 최재욱 국무조정실장과 조영장 비서실장의 사퇴건의를 받으면서 최종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에서 참모들은 "현재의 전반적 상황을 감안할 때, 현실적으로 더 이상 총리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며 용퇴를 건의했다. 한 참모는 "이보다 더이상 상황이 나쁠 수가 없다"며 "박 총리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며 사퇴결심을 굳힌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한 측근은 "최근 언론보도 상황을 볼 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면서 부동산 명의신탁 파문 와중에 박 총리 실각을 노린 정치적 계산이 개입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李相坤기자 lees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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