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본서 꽃핀 우리 도자기문화-4)가라쓰 나가자토

아리타에서 후쿠오카로 나가는 중간쯤에 가라쓰(唐津)가 있다. 옛날 일본인들은 조선이나 명(明)이나 가리지 않고 '당(唐)' 즉 '가라'로 불렀다니 가라쓰는 이름부터 우리와 깊은 인연을 맺은 곳임을 암시한다. 무로마치시대에는 막부의 직할령이면서도 '송포당'이란 해적들의 근거지였다니 어찌 조선과 관계가 없을까.

때문에 가라쓰는 어느 지역보다 도자기 문화가 일찍 들어왔고 16세기초에 벌써 조선 회령지방에서 나는 분청사기와 비슷한 '조센 가라쓰'라는 그릇들이 생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도 도자기다운 도자기가 만들어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다.

임란 때 잡혀온 윤각청(尹角淸)과 또칠(又七, 일명 용칠)에 의해 비로소 모양새를 갖춘 도자기가 구워지게 된다. 나가자토가의 초대 마다시치(又七)는 처음 아리타 인근 이마리에서 가마를 열었으나 다이묘 데라사와(寺澤廣高)에 발탁되어 '어용소물사(御用燒物師)'란 직함을 얻고 가라쓰로 옮기게 된다.

나가자토의 가마는 그후 어용(御用)가마로 명성을 떨치며 300여년을 이어오게 되는데 '일 라쿠, 이 하기, 삼 가라쓰(一 樂, 二 萩, 三 唐津)'의 유명세도 이때 얻게 된다. 즉 다인들 입에 오르내린 말로, 첫째는 조선서 건너간 기와공들이 칼로 깎아 만든 차그릇, 둘째는 혼슈 서부 하기지방 차그릇, 세 번째로 가라쓰 차그릇을 쳐준다는 영광의 호칭을 이름이다.

그 후 가라쓰는 명치유신을 맞아 폐번(廢藩)의 시련기를 맞게 되고 가마는 대부분 불씨를 놓고 폐허로 변해버린다. 이때 가라쓰 도자기의 두 가닥을 이루던 윤각청 후손들은 도업을 떠나게 되는데 지금까지 그 가문의 흔적은 찾을 길 없이 역사속으로 묻히고 만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일본 전역이 도예붐으로 달아오를 때 도공들은 물레의 거미줄을 털고 전통 방식을 되살려 다시 도업을 일으키게 된다. 때문에 도자 기법이나 문양 등은 일본 도자기 가운데서도 가장 한국적 이미지와 닮아 있는 것이다.

아리타에서 오른 두 량짜리 전철은 마치 조랑말처럼 쫄랑 쫄랑 귀엽게도 달린다. 탐스런 오렌지가 농가 담장 넘어 늘어져 있고 이제 막 꽃망울 터뜨리는 벗꽃과 어우러져 생기있는 봄의 화음을 이뤄낸다.

역에서 택시에 올라 나가자토(中里)가를 가자고 했더니 늙수그레 한 기사는 두 말 않고 차를 출발시킨다. 이곳에서 나가자토씨가 많이 알려졌느냐고 슬쩍 던져보았다.

"많이 알려졌다기 보다 가라쓰에서 나가자토 집안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그 집안은 이 곳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는답니다"

시원스레 대답하는 택시기사는 나가자토가 두 집안이 있다고 친절히 덧붙이면서 서로 이웃해 있긴 한데 다로우에몬(太郞右衛門) 집을 가야하는지 노리모토(紀元) 집을 가야 하는지 묻는다.

나가자토가는 가라쓰 임란 도공의 두 산맥중 하나인 또칠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노리모토는 형님이고 다로우에몬은 사촌동생이다. 그러나 나가자토가의 도예 대(代)를 잇고 가문을 이끌어 가는 집은 동생 다로우에몬 집이다. 우리 상식으로 언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11대 들어 장남(노리모토 부친)은 교직의 길로 가고 차남(다로우에몬 부친)이 도업을 습명(襲名)했다는 내력을 듣고 수긍이 갔다.

이후 차남 다로우에몬 집안은 가라쓰 도업을 이끄는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고 장남 집안은 교사 집안으로 가업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장남집안도 한 대가 지나 노리모토가 결혼하면서 부인이 도예를 시작하게 되고 도예 집안으로 한 줄기를 잡아가게 된다.

우선 장남 집안 노리모토를 먼저 찾기로 했다.

고풍스런 나무문간에서 인기척을 냈다. 차향을 그윽히 머금은 듯한 노인이 반갑게 맞으며 '게다'를 내놓고 정원 건너 다실에 들기를 권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노인은 가라쓰 도자기와 조선 도자기의 관계를 소상히 설명했다.

"더러는 가라쓰 도자기 뿌리가 중국이나 남방 계통에 잇닿아 있다고도 하는데 나는 조선도자기에서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동양 도자기 흐름에 관한 연구에 몰두해왔습니다. 결론은,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도자기술을 배워 나름대로의 독특한 도자 기법을 형성했고 일본은 다시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을 잡아와 일본만의 도자 세계를 이루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노인은 자신의 연구논문집을 꺼내 보이면서 가라쓰 도자기와 조선 도자기의 동질성에 대해 도자기 파편 사진을 일일이 대조해가면서 논리를 전개해 나갔다.

목소리 톤이 다소 높아진 노리모토옹은 좀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줄 게 있다며 밖으로 나가길 권한다. 그의 집뒤를 돌아나가니 흙으로 만들어진 오름가마가 봉분 마냥 푸른 잔디를 덮은 채 원형에 가깝도록 보존되어 있었다.

"이 가마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흙으로 지은 7칸의 조선식 전통 오름가마로 이미 300년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어떻습니까. 조선식 가마의 원형 그대로 아닙니까"

노인은 다시 자리를 옮겨 언덕위 조그만 사당 앞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과거부터 도공들이 도업이 번성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던 산신각이라고 했다. 겉모양을 언뜻 봐도 우리나라 절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신각과 닮아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노인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다로우에몬 집안으로 안내해주겠다면서 앞장섰다.

다로우에몬의 작업장에는 큰아들 나가자토 다다히로(中里忠寬)가 목련이 꽂힌 화병을 앞에 두고 작업에 온 정성을 쏟고 있었다. 13대 나가자토 다로우에몬은 전시회 관계로 도쿄로 출장가고 그의 작업대 위에는 그리다만 물고기 문양의 항아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다로우에몬에게는 언뜻 떠오르는 두가지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물레를 차서 그릇을 만들기 보다 두들겨 만드는 것을 특기로 한다는 것. 또 하나 그는 일본 내에서도 물고기 문양의 대가로 통한다. 살아있는 물고기의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낚시꾼에게 돈을 주고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부탁해서 어항에 넣고는 하루종일 그 앞에 앉아 스케치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물고기 문양을 즐겨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타다히로도 물고기를 즐겨 그립니까"

"나는 아버지와 다릅니다. 물고기가 아버지의 특허라면 나는 나대로의 색깔이 있어야 겠지요. 그래서 나는 꽃이나 야생초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중점을 두는 부분은 정태적인 꽃이 아니라 살아있는 꽃을 묘사하는데 있습니다"

"지금하고 있는 문양은 면상감(面象嵌)기법으로 과거 조선시대에 더러 쓴 것으로 아는데…"

"이것은 백상감으로 조선의 기법과 다릅니다. 조선은 면상감을 한 경우가 없습니다. 중국에서 많이 쓴 기법이죠"

다다히로의 억지 주장에 말문이 막혔다. 누구나 한국 사람이라면 한번쯤 보았을 법한 '분청사기상감연엽문편병'을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보일 수 없는 게 답답했다.

그렇다. 일본 도자 기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와 별반 차이날 게 없다. 이네들의 기술이란 것도 바로 우리들의 기술이 아닌가. 옛날 우리 선조들이 했고 지금 도공들이 하듯, 흙을 걸르고 물레를 돌리고 문양을 새기는 식으로….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이런 과거의 것들을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고 체계화시킨 후 그 틀 위에서 나름의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일 뿐이다.

취재를 마무리하며 역으로 향하는 발길 끝에는 밀려드는 어둠과도 같은 울적함이 묻어난다. 이네들은 전통을 생활의 일부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우리는 왜 전통을 깡그리 내다버리고 이네들의 도자기술을 다시 배운다고 법석인가. 체증에 걸린 것처럼 가슴에 묵직한 것이 짓누른다.

-글·사진 全忠瑨기자

---나가자토 노리모토 씨

-임진왜란에 관련된 책을 출판한 것으로 아는데….

▲일본은 조선 도공을 잡아와 오늘날과 같이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켰는데 일본인들은 그 이후 조선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역사선생으로 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만큼 임진왜란사를 객관적 관점에서 규명하고 싶었다.

-일본인들도 도자기전쟁을 인정하는가.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규슈의 도공 후손들 중에는 조상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틀리지 않는 역사를 배우기를 원하고 그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한다.

-구체적인 활동은 어떻게 하는가.

▲연구활동을 강연 등을 통해 발표한다. 얼마전에는 가라쓰의 초등학교 강연후 학생들 사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이 과연 성공적이었느냐는 토론이 있었다. 이 때 어떤 학생들은 조선서 가져온 도자기를 가지고 이뤄낸 가라쓰 도자기를 두고 자만할 수 있느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로 인식이 바뀌어가고 있다.

-앞으로 한국과 관련된 활동 계획은.

▲역시 나의 관심은 한일간의 도자사 규명이다. 특히 이도(井戶)다완에 관심이 많은데 그 고향을 찾아보고 싶다. 한국 경남대 박물관에서 발간한 청도댐 수몰지 유적 조사 보고서를 봤는데 그 곳에서 출토된 그릇조각들이 이도다완과 유사한 듯해 가을쯤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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