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처음 취재 교섭을 할 때 코디를 맡아준 한국인 교포는 내게 물었다. 임란 도공의 어떤 부분을 취재할 것인가고. 당연히, 임란 도공의 행적과 후손들 활동을 다루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인상이 약간 찌푸려지는 듯하더니 "말하자면 전쟁포로로 끌려와 핍박받은 400년전 선조를 찾겠다는 겁니까"고 한 발 앞서 나갔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애초 취재 포인트를 잘못 잡았습니다"고 한마디로 잘랐다.
'좀 배웠다는 사람도 역시 일본에 오래 사니 별 수 없이 일본쪽으로 기우는구나'내심 반발감에 언짢은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임란 도공들이 어떤 경로로 잡혀왔건 초기에 고생한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조선 도공들은 알려진 것과 달리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단적인 예로 하기(萩)에 있는 사카 고라이자에몬(坂 高麗左衛門) 집안을 본다하더라도 그 곳은 어용요로 인정받고 다이묘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하사받았습니다. 앞으로 확인하게 되겠지만 동(東)하기역에 내려 사카 집까지 가는 동안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가지 못할 정도입니다"
400여년 사카 집안을 되짚어 볼 때 그 이야기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카가의 초대 이작광(李勺光)은 진주 부근의 관요(官窯) 사기장으로 임진왜란 때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에게 잡혀온다. 모리는 차(茶)에도 일가를 이룬 다이묘로 센리큐와도 교분을 나눌 정도였다. 그는 도토(陶土)가 나고 적송(赤松)이 풍부한 하기에 어용(御用)가마를 개설하고 그릇굽는 일을 이작광에게 맡긴다. 몇년 뒤 정유재란 때는 이작광의 동생 이경(李敬) 부부도 포로로 잡혀와 형과 합류한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하기요는 어용요로 대접을 받으며'사카 고라이자에몬'이란 성과 함께 막대한 토지를 하사받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대대로 부가 축적되어 도자기를 하지 않고도 충분히 먹고살 만큼 된다는 것이다.
하기 시내는 아름드리 나무들로 둘러싸인 신사(神社)가 곳곳에 있어 유서 깊은 도시임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시내 외곽의 전망좋은 곳에는 군데 군데 전통을 자랑하는 다정(茶亭)들이 자리잡고 있어 한결 운치를 더해준다.
그러나 낭만적 풍경도 잠시, 12대 사카씨는 순수 일본인이라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 조바심이 앞섰다.
그는 동경 예술대학 회화과에서 일본화를 전공하고 고건물 채색 일을 하던 중 외동딸만 있던 11대 사카 가문의 사위로 장가들게 된다. 1984년부터 도예의 길로 들어선 후 12대 사카로 습명한 남다른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기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사카 가마는 산기슭 외딴 곳에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집을 둘러싼 산들은 모두 사카 집안 소유로 최근에는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일부는 현(縣)에 헌납했다고 안내인은 전했다. 집앞 철쭉 울타리를 따라 안마당으로 들어서니 백년은 족히 넘었을 법한 기묘한 형태의 정원수들이 숲을 이루고 연못에는 비단잉어가 한가로이 자맥질하고 있었다.
안주인의 안내로 든 다실은 손때가 묻은 큼직한 찻상이 하나 놓여있을 뿐 단촐하기 그지없었다. 그 가운데 화병에 꽂힌 들꽃 한 송이는 빈객의 눈길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하다.
차가 나오고 청바지 차림에 콧수염을 기른 12대 사카씨가 다실로 들어서더니 몸에 밴 예의로 사람 좋게 인사를 청했다.
"일 라꾸 이 하기 삼 가라쓰란 말에서부터 하기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기의 어떤 점들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일 고라이(高麗) 이 라꾸란 말도 있습니다. 이 때 고라이는 하기를 뜻하지요. 그것은 하기의 그릇이 고라이(조선 다완)와 가장 유사한 그릇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을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가마구조, 그릇 재는 방식까지도 선조들이 사용한 그대로 조선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라꾸 그릇과 달리 우리 도자기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흉내낼 수 없죠"
"선조들 가운데는 특히 어떤 분들이 두드러집니까"
"우리 가마는 대대로 어용요였기 때문에 모리가문에서는 헌상받았던 우리 선조들의 명품을 모아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올 10월에는 하기가마 400년을 맞게 되는데 집안의 명품들이 유럽 순회전시 나들이를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부터 3대까지의 작품은 많지 않은 편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1대, 4대, 8대의 작품이 뛰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역시 작품을 오랫동안 한 분들이 명품을 빚어냈습니다. "
실제 사카 집안이 지금까지 독보적인 명성을 이어 오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사카 집안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도자기를 할 수 있고 심지어 직인까지도 '하기 야끼'란 이름으로 도자기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단하나 대대로 습명을 받은 사람 외에는 누구도 하기다완을 만들 수 없다는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은 오늘날까지 불문율로 전해내려와 하기야끼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하기 야끼의 작품들은 분명한 두 얼굴로 나타난다. 즉 전통을 계승한 다완의 한 모습과 자유분방하기 그지없는 개인의 작품들로.
현재 12대 사카씨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다완은 다완으로서 기능과 품격에 충실하여 전통과 맥이 잇닿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심취하고 있는 개인 작품에서는 일본의 어떤 도자기보다도 현대적 감각이 배어나 전통과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작품 중에는 달밤의 억새풀이나 단풍나무를 채색한 합(盒)이나 항아리도 볼 수 있는데 표현 방식이 이젤에 그려진 세밀화보다도 정교해서 '과연 도자기에 이런 그림을 표현할 수 있는가'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것은 곧 전통의 현대화였다. 그 변화는 선대들의 작품에서 확연히 볼 수 있다면서 사카씨는 선대 작품 수장실로 안내했다.
수장실에는 초대부터 11대까지 명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00여점 다완 하나 하나는 모두 명기들로 전시회에 나가면 1점당 하루 보험료만 200만엔(2천여만원)에 이른다는 말을 들었기에 완전히 압도 당할 지경이었다.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어렵고 새로운 기법과 충돌에서 오는 갈등의 연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3대까지는 고유양식이 지속되다가 그 이후 바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 보관된 '청자관음상'은 고려청자와 같은 가마에서 썼기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카 가문이 조선 후예라는 증거가 되거니와 어떻게 전통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 12대 사카씨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문양기법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현재 전시회 때문에 모두 실려나가고 없어 많이 보여줄 수 없다며 미안해했다. 하긴 한 점당 200만엔에서 700만엔 정도에 하는 작품들이 주문이 밀린다니….
일본 도자기 가운데서도 가장 화려하고 앞서가는 문양기법을 대담하게 구사하는 사카씨의 역량이 부러워보였다. 뿐만 아니라 다완의 전통을 지키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노크하는 작가적 정신은 감동적이었다.
대문 밖까지 따라나와 배웅하는 허수룩한 그 중년의 남자는 분명 도도히 흐르는 일본 도예 물줄기를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세계는 언제나 일본 도예를 주목하게 될 터이다.-글·사진 전충진기자
----12대 사카 고라이자에몬
-사카씨의 작품은 회화적인 면이 강하고 일면 전통 다완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건 아닌가요.
▲일본화는 종이에 그리죠. 나는 흙에 현대의 그림물감을 넣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 시도하고 15년째 실험 중입니다. 이젠 어느 정도 자신이 서지만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그러나 다완으로 말한다면 전통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모모야마(挑山)시대 다인들의 세계에서 추구한 아름다움을 계승하면서 현대적 기법을 가미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조선의 전통적 기법 위에 일본의 정서적 느낌을 첨가한 세계를 추구한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전통의 계승과 상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만일 우리 선대들이 계속해온 작품의 기법만을 그대로 고수한다면 과연 사카 도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본적인 틀은 지키되 현 시대 상황에 맞추어 다른 사람이 받아들을 수 있도록 해나가는 것이 문화의 완성이고 미의 승화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나는 사카 집안의 현대적 기법을 도입한 출발점이란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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