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王회장 퇴진 돌연 없었던 일로

정부와 채권단이 현대의 자구책에 포함시켜줄 것을 강도높게 요구했던 정주영 명예회장과 일부 가신경영진의 퇴진 문제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정부와 채권단은 '서슬 퍼렇던' 강경자세에서 크게 후퇴, 이들의 퇴진을 과거에도 요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외환은행과 현대가 자구책을 놓고 협의를 벌이고 있으나 정 명예회장과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퇴진문제가 합의서에 포함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이렇게 될 경우 현대의 자구책은 단순한 유동성 대책일 뿐 정부가 요구해 온 '특단의 자구책'이나 자신들이 내세운 '뼈를 깎는 노력'과는 거리가 멀어진다.◇꼬리내린 정부.채권단=이용근 금융감독위원장은 29일 정 명예회장과 가신경영진 퇴진문제에 대해 "정부가 특정인사(정 명예회장, 이익치 현대증권회장)를 거명해 나가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 외환은행의 이연수(李沿洙) 부행장은 "특정 경영진의 퇴진문제는 채권은행이 거론할 문제가 아니며 현대가 입장발표에서 언급한 후계구도, 지배구조개선 등을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는 정부와 채권단이 앞으로도 이들의 퇴진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정부는 당초 현대문제의 본질은 일부 계열사의 유동성문제가 아니라 '왕자의 난'에서 보듯 지배구조에 대한 신뢰성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정부는 이에 따라 현대문제 수습 과정에서 정 명예회장과 일부 가신 경영진을 퇴진시킴으로써 현대의 '황제경영'을 확실하게 종식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왔다.정부는 특히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비롯한 일부 가신 경영인이 정 명예회장의주변에서 현대의 지배구조혁신이나 경영투명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시각이었다.

◇왜 서둘러 봉합했나=시장을 담보로 한 현대의 강력한 반발에 뾰족한 대응책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한종금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과 영남종금 영업정지 이후 주식시장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데다 채권시가평가제 시행을 앞두고 투신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정부.채권단과 현대의 힘겨루기가 지속될 경우 시장이 깨질 우려가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금감위 관계자는 토로했다.

정부 관계자는 현대는 이미 정부나 채권단의 이같은 약점을 충분히 알고 애초부터 버티기로 일관했다며 시장과 투자자들을 볼모로 잡고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나오는데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다른 정부 관계자는 지난 3월 '왕자의 난' 이후 몽구-몽헌 형제간 그룹 분할과 상속이 진행되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무소불위의 카리스마로 가신들을 통하든 아들을 통하든 사실상의 총수 역할을 하고 있는 정 명예회장이나 그가 총애하는 가신들에게 퇴진하라는 요구는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던 것이라고 '전략상의 실책'을 인정했다.

◇후유증 적지않을 듯=정부는 현대와 대결하는 모습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대놓고 누구누구는 물러나야 한다는 식의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할 수 없으나 채권단을 앞세워 어떤 형식으로든 이 문제를 매듭짓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대가 현재의 상황은 지배구조에 대한 신뢰성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계열사의 일시적 유동성의 문제인 만큼 이 부분만 해결하면 되는 것이지 특정 경영진의 퇴진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경우 마땅한 대책도 없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부나 채권단의 속마음과 달리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이 경우 재벌에 대한 정부의 권위 실추로 향후 재벌 개혁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한 금융계 인사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깊이 연루됐고 현대투신 부실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데다 형사처벌까지 받아 감독기관이 퇴진을 요구할 뚜렷한 명분이 있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하나 어쩌지 못하는 정부가 다른 재벌에 경영.지배구조 개선 운운한다면 소가 웃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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